[화이] 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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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표종성

 

 

나달거리는 종성의 외투 위로 붉은 손바닥 같은 단풍이 하나, 둘. 이두에서부터 근율 골을 따라 흐른 핏물이 손톱 새를 타고 들어 바닥으로 낙하해 꾸미어낸 웅덩이에 셋. 화이의 시선은 단풍을 따라 휘둘리다 바닥에 무력하게 나뒹구는 몸뚱이에 정지했다. 사내는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다. 바로 뜨여지지도 못한 눈엔 핏물이 고여, 흡사 피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중간히 긴 곱슬머리는 땀과 체액으로 범벅된 채였다. 시간이 정지한 듯, 화이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닥쳐온 마지막에서 입을 다물었다.

 

은신하고 도망치고, 유인하고 함정에 빠트린 모든 길고 지루했던 순간들의 끝이 이토록 허무하고 또한 돌연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이 끝난 하룻밤.

 

아저씨. 그, 일이 다 끝나면……. 그러면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에요?

 

어색한 순간이었다. 저녁을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드민 생각을 화이는 머릿속에서 거를 겨를도 없이 뱉어내버리고 말았고, 종성의 숟가락질은 그대로 멈췄다. 종성은 늘 화이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주저했다. 덩달아 멈춘 화이의 숟가락질에 식탁엔 그저 침묵만 돌았다. 양말 속 화이의 발가락이 견디기 힘든 공기의 무게에 오무작거렸다. 동시에 종성은 깊은 숨을 내쉬곤 화이를 바라봤는데, 화이는 마주친 시선에도 종성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늘 어려웠고, 복잡했고, 아득했다.

 

지금도.

 

고작 열 발자국 남짓한 거리는 횡단할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것 같이 창망했다. 저를 가운데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수와 종성의 싸움은 화이가 감히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싸움 속에서 화이는 고립된 채였다.

 

종성은 화이의 어깨너머를 보는 듯 했는데, 시선의 종착지를 찾을 도리는 없었다. 종성은 건축되다 만 후로 주인 없이 버려진 건물을 등지고 있었는데 비죽배죽 튀어나온 철골들은 금세라도 모두를 덮쳐버릴 듯 위협적이었다. 바람 한번 불라치면 너나없이 윙윙대고 캉캉거리는 잡소리들은 나름대로의 장송곡을 불러주는 것 같기도 하였다. 머리가 터져죽은 동명수를 애도하는 유일한 것들이다. 명수의 온 몸에서 속절없이 흐르는 핏물이 화이와 종성의 사이를 갈랐다. 엎어져 죽은 꼬라지는 추했다.

 

화이를 보던 종성의 눈길은 이어 동명수의 행태를 살폈는데 화이로써는 종성이 동명수의 죽음을 재확인 하는지 아니면 그 장면을 세세히 기억하려 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먼지바람이 일어 화이의 남색 교복 위로 돌차간에 모래 색을 덧씌웠다. 허리를 수그린 화이가 눈을 가느스름하니 뜨고선 말아 쥔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잔기침을 할 적에 종성은 숨을 죽였다.

 

명수는 이중구의 숨통이 끊어졌던 몇 년 전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음을 맞았다. 종성은 그걸 알았다. 동명수가 굳이 납치한 화이를 이리로 데려온 것은 저의 마지막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종성은 이 죽음의 자리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저도 저의 마지막은 베를린의 광활한 갈대밭에서 맞아야 한다는. 정희의 숨이 끊어진 그 곳에서.

 

앳되었던 청년 적의 동명수는 동중호의 입김 덕에 아직 훈련이 덜 된 채로 현장에 투입될 기회를 잡았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리학수와 함께 남파되어 기업형 조직폭력배 집단인 골드문의 설립에 이바지했었다. 햇수로 따지자면 십여 년 즘 된 일이었다. 당시의 동명수는 이중구의 최측근이었다는 건 조사를 통해 비교적 간단히 입수할 수 있었지만 같은 곳에서 마지막을 맞은 둘의 자디잔 인연의 중간을 알기란 난해하고 번다스러운 일이었다.

 

 

“……집에 가요.”

 

 

흘러가는 상념이 정희에게로 번지기 직전에 개입한 것은 화이의 목소리였다. 종성은 마지못해 죽어버린 목숨에게서 관심을 돌렸다. 아저씨, 집에 가요. 울 거 같은 목소리였다.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감정을 그럴싸하게 싸맬 줄 아는 화이의 목소리에서 툭 치면 와르르 터져 나올 듯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화이는 저의 말이 어째서 그렇듯 떨리는지, 주체할 수 없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교과서적인 끝맺음인데. 지금이 어렴풋이 짐작해오던 가장 이상적인 마지막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악인은 차가운 주검이 되었고, 종성과 저, 둘 중 하나도 목숨이 위협받거나 끊어진 사람은 없었으니.

 

 

“수고했다.”

 

 

검은 스크린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글자. 영화의 마지막처럼 순식간에 페이드 아웃되는 순간순간. 단풍이 나리는 가을. 석양이 드리우는 저녁에 종성은 또박또박 마지막이란 글자를 새겨 넣는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탄알 한 발이 어디 쓰여야 할 지 종성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맹목적인 확신이었다. 이미 종성의 마음은 자리에 없었다. 갈대밭의 한 가운데서, 사각사각 저들끼리 몸을 부비는 갈대들의 금빛 파도 속에서 표류하는 생각만이 종성의 전부였다. 이미 점멸해버린 화이의 자리는 간 데 없었다.

 

 

“집에, ……집에 가야죠.”

“…….”

“아저씨.”

 

 

애타는 목소리에 종성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건조하게 일어난 입술이 거칠었다. 스승의 아들. 종성은 애써 웃어보여야 할까 고심했다. 웃어본 적이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으면서. 어쩐지 화이에게 저의 마지막은 그리 기억되고 싶었다. 한 명쯤은 저를 그렇게 기억해줘도 좋지 않을까. 생각과 달리 입 꼬리는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기동안…….”

“…….”

“고마웠다.”

 

 

작별이었다. 종성은 돌아섰고, 건널 수 없는 강물, 혹은 주검이 피로 그어놓은 경계선 너머에서 화이는 울음을 삼켰다. 작은 몸뚱아리에 그 울음을 간신히 밀어 넣던 화이가 끝내 주저앉아 갓난쟁이처럼 울음보를 터뜨린 것은 종성이 건물을 돌아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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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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