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종성명수] 집착
[화이] 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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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표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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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동명수
“바루 쏠거이 아니었으면 관자놀이에 겨누지 말았어야지. 거, 한번 고개 돌리며느 기케 피하기 쉬운 곳도 없다는 거 모르니?”
비웃적대는 말투로 동명수는 제 아래 완전히 제압당한 화이에게 말했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화이는 이를 갈았다. 살아있는 눈깔이다. 동명수는 소리 없이 으르렁대는 화이를 깔아보면서 잠시간 감상에 잠겼다. 아직 피도 덜 마른 놈이 총이며 칼이며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라 호기심이 인 탓이었다. 저나 표종성 같은 공작원들에 비한다면야 뒤떨어지지만, 그렇다고 무시할만한 수준의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기를 내지르는 데 겁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특수부대로 교육을 받는 훈련생 중 낙오자의 대다수는 실력부족보단 심약한 성미가 문제가 되곤 했다. 칼도, 총도, 그 외의 온갖 무기들도 저의 손 마냥 다룰 줄 알면서 정작 그것을 내지르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소년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적어도 살아있는 것, 그 중에서도 사람을 한번쯤은 죽여본 적이 있다는 소리였다. 동명수는 큭큭대며 웃었다. 리학수 놈의 아들이 다른 놈 손에서 이토록 잘 자랐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동명수는 화이의 날개 뼈 위를 깔고 앉아 그 머리에 총구를 디민 채로 혀를 쯧쯧, 찼다. 사실 화이 그 본인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리학수가 조국을 배신하고 망명을 시도한 것에 연좌제를 물어 리학수의 노모와 아내, 화이까지 몽땅 죽이는 것이 맞는다고는 하지만 동명수가 화이를 이토록 쫓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표종성.
말이 좋아 형님 동생이지, 실은 허울뿐인 관계만을 유지해오던 남자. 수련생 시절, 동명수보다 두 학급이 위였지만 실력은 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로 숙련된 사내였고, 저의 아비가 동중호인 것을 빤히 알면서 저를 지나는 개 보듯 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 당돌함인지 자신만만함인지, 아니면 무관심인지 모를 표종성의 행동이 어린 동명수를 자극한 것은 사실이었다. 남들은 저의 눈에 못 들어 안달인데 저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저러는 건지. 그래서 네가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 싶어 치댄 것이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첨에는 두고 보잔 식의 접근이었고, 다음에는 무표정에서 살금살금 흘러나오는 감정이 재밌었고, 그리고 후에는 저의 감정이 흘러 넘쳐버렸다.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었으나 곧게 흐르지 못한 동명수의 마음은 비뚤게 자라나 몽실하고 두근거리는 연애감정 하나 없이 지독한 집착만이 잔여하게 돼 버렸다. 동명수도 그것을 은연중에 알았으나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어릴 적부터 원하면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없었다. 이번에도 그러면 될 것이라고, 동명수는 생각했다.
아니었다. 빗나간 예측이었다. 어디 이름난 정부 요직인사의 자식도 아닌, 촌에서 나고 자란 별 볼일 없는 여자가 표종성을 가로챈 것이다. 처음 표종성이 여자를 만난단 소문이 돌 적에도 동명수는 저 돌부처 같은 사람이 누구에게 넘어갈 리가 없다고 자신만만했지만, 결과적으로 표종성은 련정희와 식을 올렸고 졸지에 동명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동명수의 입장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였다. 표종성은 늘상 동명수를 불편이 여겼고 련정희와 만날 적에 동명수는 일말의 고려대상이나 혹은 저의 연애 사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표종성은 결혼했고 동명수는 이를 갈았다.
“이제와 하는 말 이디만, 울 형님이 자식이 하나, 아니, 둘 있었디 그래.”
뜬금없는 회상에 화이는 동명수의 의중을 읽으려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 둘 다 모두 내가 숨통을 끊디 않았갔서? 둘째를 뒤지게 할 때는 그 에미도 같이 죽였디.”
“…….”
화이로서는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표종성에게 아내가,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몰랐으니. 동명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 표종성이 곁에 있는 건 여자 아이 할 거 없이 다 죽였단 말을 하는거이야.”
“대체 무슨…….”
화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동명수는 화이의 목을 조르듯 짓눌렀다. 뒷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중압감에 화이는 컥컥 소리를 냈다.
“표종성이는 내 거다.”
동명수가 고개 숙여 귓가에 속닥였다. 화이는 귓가에서부터 소름이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온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느껴지는 썩어빠진 감정의 깊은 나락은 맹수의 아가리마냥 위협적이었다. 동명수가 방아쇠의 손가락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에선 오로지 메마른 감정만이 비쳤다. 뱀 같은 눈. 무감정한 눈이다. 화이는 저의 죽음을 직감하고선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동명수에게 저의 감정을 들켰는지. 표종성도 모르던 제 속내를 들킨 것이 마냥 억울하고 눈물겨웠다.
“멈추라!”
그 순간이었다. 동명수가 화이의 목숨을 앗아가기 직전, 늙은 창고 문이 끼이익, 쾅! 하고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항시 굳건히 닫고 다니던 종성의 입에서 큰 소리가 튀어 나간 것은. 들이닥친 종성의 존재에 동명수의 신경은 단숨에 화이에게서 거두어졌다. 죽음의 직면에서 살아남은 화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곤 동명수의 정신이 팔린 틈에 그 몸뚱일 팩하니 밀치고선 일어났다. 이 간나……! 동명수가 외치며 화이를 쏘아보았으나 그새 저에게 총을 겨눈 종성 탓에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었다.
동명수가 잔뜩 벼려진 눈길로 표종성을 쏘아 보았다.
“……잘도 찾아오셨소.”
달갑지 않다는 투로 동명수가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천하의 표종성이 저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이토록 헐레벌떡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동명수로써는 반가울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이는 동명수가 뿌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릴 얼핏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곱게 뒤지고 싶으면……, 화이는 가만 두라하디 않았네?”
그럴 상황이 아님을 알면서도, 평소에도 부르지 않던 제 이름을 불러주는 종성의 목소리에 화이는 모든 것에서 무감해진 마음에 작은 두근거림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