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 조현수 x 한재호

 

 

 

공기는 축축했다. 비가 온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날씨는 공기가 젖어있었다. 조현수의 눈물은 마르지 못했다. 느리게 흐르는 눈물이 귓가로 떨어진다. 하늘은 점차 개여서 남색이 파란색이 되고, 파란색이 하늘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목이 버석버석했다. 어느 생각도 할 수 없는 적막이다. 사고는 멈추고 숨은 미약하다. 길바닥에 버려져있을 한재호는 차가울 것이다.

조현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깜빡. 그 정도였다. 삼 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눈꺼풀 너머로 보이던 푸른 공기가 단숨에 사라졌다. 그래, 마치 촛불이 훅, 하고 꺼져버리듯이. 눈가가 뻑뻑했다. 울어서인지 메말라서인지 모를 정도로 애매한 감각이다. 시트위에 바로 뉘였던 몸이 어느새 모로 돌려져 있었는지 조현수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이다.

눈을 뜨면, 하늘은 없고 누런끼가 도는 낡은 시멘트 벽이다.

코가 시큰했다. 담배 냄새다. 매캐한. 그리고, …….

익숙한.

마치 경련이라도 하듯 퍼득 떨며 조현수가 몸을 일으켰다. 놀란 몸의 어깨와 목덜미가 화드득 떨리며 소름이 올랐다. 관절이 삐걱거리고 근육이 욱신거렸다. 어딘가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총을 맞아 꿰매고 민철의 손으로 후벼파졌던 팔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눈이 뻐근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먹먹함이 조현수의 오감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조현수는 멍이 든 눈가를 찌푸리고 머리를 가볍게 털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정면에 철창, 그 너머의 영근. 그리고 오른쪽에…….

 

“이 4m 담벼락 안에는, 딱 두 가지 종류 새끼들 밖에 없어.”

 

아.

아아.

아.

조현수의 손이 낡은 시트를 긁듯이 움켜쥐었다.

 

“건드려도 되는 새끼들. 그리고 건ㄷ,”

“건들면 안 되는 새끼들…….”

“허어?”

 

한재호의 입에서 시작해 조현수의 입으로 끝난 문장이었다. 한재호가 눈썹을 꿈틀하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치이익 소리가 요란했다. 제가 할 말을 빼앗긴 한재호는 ‘어쭈?’하는 눈빛으로 조현수를 응시했다. 조현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현수의 얼굴을 살피느라 한재호는 그 약한 떨림을 잡아내지 못했다.

조현수의 표정은 이상야릇했다. 마냥 놀라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눈빛. 한재호는 그 읽을 수 없는 감정에 골몰하듯 조현수의 눈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조현수의 눈동자에 한재호의 그림자가 졌다.

한재호의 등 뒤에서 쏟아지는 노란 달빛이, 불과 일 분 전까지 보던 푸른 하늘과는 너무나도 극명한 대척점에 선 빛이라 조현수의 눈은 어지러웠다. 3년만에 보는 한재호의 수감번호는 낯이 설었다. 질이 나쁜 보급형 재소자 옷은 서걱거렸고, 살갗을 스치는 감촉이 까슬했다. 631. 가슴의 까만 자수는 올 하나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꿈처럼 아찔하게 멍한 정신을 추르스지도 못한 채, 조현수는 입을 벙긋거렸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다시금 파란 하늘이 쏟아져내릴 것 같았으므로.

 

“그럼……. 그 쪽, 은요.”

 

조현수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나올지, 제가 어떤 대답을 할 지도. 지옥을 향해 가라앉는 느낌이 아직도 선연한데, 난데없이 지상으로 끌려나온 정신은 어지러웠다. 한재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청각마저 아득한지라 한재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조현수는 이미 대답을 들은적이 있었다. 어느 쪽 같으냐, 하고 되돌아올 질문. 날숨처럼 뱉어질 헛헛한 웃음소리. 한재호의 뭣도 아니기 이전의 제가 들었던 목소리.

왈칵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억울해서? 갑갑해서? 반가워서? 혼돈처럼 뒤섞인 감정은 정의를 내릴 수 없도록 얽히고 섥혀서 뭉그러져있었다. 코 끝이 시큰해서 조현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건들면 안되는…, 새끼들 쪽. 조현수의 목소리가 작았다. 서서히 올라오는 현실감에 목이 메는 응어리를 삼키기 어려운 탓이었다.

 

“아니. 나는 그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다.”

 

한재호가 말했다.

마치 되감기한 영상을 보듯이 조현수의 기억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문장이었다.

조현수와 한재호의 눈이 마주쳤다. 조현수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한재호는 그 의미를 알 지 못했다. 눈치가 기민하고 상황판단이 빠른 한재호에게 드문 일이었다. 조현수는 미래의 감정으로 한재호를 보고 있었으니 한재호가 이해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꿈일 수 없는 생생한 감각들과 세세한 기억들의 조각 사이에서 한재호는 유유자적했다. 괜히 사고쳐서, 징역 깨지마라. 한재호가 말하면 조현수는 이를 악물었다. 돌림 노래처럼 가장 처음으로 돌아온 이 관계를 어쩔지 몰라 그저 시선을 받아내기만 하면, 한재호는 손을 가볍게 내밀며 중얼대는 것이다. 자기는 멍도 예쁘게 든다면서.

조현수는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한재호에게 총을 맞은 날 이후로, 그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마지막 날 한재호는 조현수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고 그렇게 인생의 막을 내렸다. 수천번이고 수만번이고 끌어안고 쓰다듬어주던 눈빛과는 달리 손끝조차 대지 않은채로 말이다. 조현수가 망각한 체온이다. 받을 날이 많을 줄 알아 진즉 털어낸 온기다. 한재호의 손길대신 조현수가 얻은 것은 시린 하늘과 차게 식은 운전석이었다.

한재호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조현수의 광대를 스쳤다. 조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지금, 조현수의 텅 빈 증오는 갈피와 뿌리를 모두 잃었다.

돌아나가는 한재호의 너른 등은, 저는 걸음걸이에 따라 작게 기울며 움직였다.

우리는 또 다시 여기구나. 조현수는 생각했다. 당신과 나는 밤에 시작했고, 새벽에 끝이 났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비극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임을 한재호, 당신은 알까.

Posted by 백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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