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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ISSION

"매 끝에 정든다는데, 또 아오? 대군과 정분이라도 날 지."

"네 놈은 어찌 오늘만 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저 놈의 머리가 그새 자랐는가. 방원은 꼭 급류마냥 급하게 굽이쳐 흐르는 휘의 머리칼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목덜미나 간신히 덮던 것이 이제는 어깻죽지도 능히 덮겠구나. 흐트러진 시야를 따라 휘의 머리칼은 방원을 놀리듯 부드럽게 흘렀다. 대군. 휘가 속살대듯 방원을 불렀으나 방원은 흘려들은 듯 대답하지 않았다. 시야는 흐렸고 귀는 먹먹했다. 약주가 과한 탓이다. 

며칠 전 막동莫同이의 백 일이라, 삼신상三神床으로 치성을 드리고 일가친척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었다. 충신을 벤 악귀이자 기방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망종이라도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대군, 술이 과하십니다, 하고 태령이 기어코 말릴 정도였으니 방원의 취기가 평소와 달리 인위적이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참으로 무리해서 자셨소. 휘가 방원의 귓가에 한 번 더 속삭이면 방원은 으응, 하고 느리게 끌리는 음성을 냈다. 신음인지, 대답인지, 잠꼬대인지 얼핏 들어서는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내, 기분이 과히 좋아서……. 대답은 뒷말이 흐리고 멕아리가 없었다. 얼핏 휘가 웃음을 삼킨 것도 같았으나 방원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휘의 굽이치는 머리카락만 방원의 시야에 하냥 들어올 뿐이었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같은 생각이 다시 맴돌았다. 

남전을 죽이고자 그 마당에 뛰어 들어간 서휘를 구해내 품은지가 햇수로 오년이었다. 아니, 남전의 칼에 누이를 따라 죽고자 한 놈을 억지로 살려둔 게 다섯 해 전이라는 말이 옳을 수도 있었다. 방원은 중천에 뜬 태양과, 서휘의 칼끝에 스러진 남전의 검들이 널브러진 마당을 기억했다. 종 2품 판중추원사 앞에서, 세자는커녕 개국공신도 아닌 한낱 군君인 자신이 뽑던 검에 담았던 진심도 여직 잊지 않았다. 

현비顯妃 소생의 의안대군이 세자가 된 게 백로白露였다. 허니 보다 시일이 지난 당시는 날이 맑고 선선했어야 옳을진대 기묘하게도 하늘부터 대지까지 끓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방원의 마음도 그러했다. 칠점사의 독이 휘에게서 넘어와 엉겨 붙기라도 한 것처럼 방원의 속은 태양을 삼킨 듯 그리 지글지글 끓었다. 끄트머리가 어깨나 겨우 스치던 휘의 머리칼이 지독하게 새카만 강물 같아 그랬고 지키러 온 자신의 걸음이 늦었을까 무섬증이 일어 그랬다. 누이의 죽음 앞에서 서휘가 그러했듯 휘의 죽음 앞에서 방원은 다급했다.

 

“……대군.”

 

다시금 부르는 음성에 방원이 힘없이 늘어뜨렸던 고개를 간신히 들었다. 눈앞은 아직도 어지럽고 번잡하여 통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무르녹은 어둠 속에서 휘는 그림자를 갑옷인 양 두르고 있었다. 일면 위태하였으나, 까만 눈동자에 박혀 반짝이는 생기는 온전했다. 임신년壬申年에 휘에게서 물러난 죽음은 한 발 뒤에서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었다. 내 반드시 너의 죽음보다 남전의 죽음이 이르게 하겠다. 방원은 호언장담했던 수 해 전의 자신을 되짚었다. 기억은 물속에 넣고 흔드는 양 일렁이고 있었다. 술이 과하단 태령과 휘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늦게 저를 부른 소리에 호응하듯 방원이 휘야, 하고 그 이름 한 자를 조심스럽게 읊었다. 방원의 목소리가 젖은 듯하여, 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등허리가 간질거리는 기분은 야릇했다. 입술을 달싹인 방원의 눈가가 붉었다. 붉은 기가 밴 방원의 눈이 매섭지 않은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리 경계가 허술하시니 봉변을, 당하는 게 아니오.”

“…봉변이라.”

 

서휘가 골라낸 봉변이란 말이 낯설어, 방원은 몇 번이고 혀 위로 단어를 굴렸다. 혀는 무뎌서 고작해야 두음절인 단어를 버겁게 훑어냈다.

송도의 추동楸洞, 용수산 아래 자리한 아흔 아홉 칸짜리 방원의 사저는 스물도 넘는 을조가 곳곳에서 번을 서고 있었다. 그 뿐이랴. 가장 중요한 사랑채는 갑조인 천가와 태령이 길목을 막아선 참이다. 사병을 혁파한다는 어명이 있었으니 겉모습은 노비로 꾸몄으나 단단한 손아귀에 칼 한 자루씩 찬 모양새가 노비와는 거리가 한참이었다. 초경初更이 훌쩍 지난 야금夜禁 시각, 이리도 흉흉한  정안군의 사저에 감히 누가 들이닥쳐 봉변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내 말이 틀렸소?”

 

허나 서휘의 의견은 영 다른 듯싶었다. 작게 속살거림에도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말투는 활기를 품고 펄떡였다. 지척에서 가볍게 웃음을 삼키는 휘의 음성이 방원의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술에 취해 기력 없이 고꾸라지려는 목에 간신히 힘을 주고 눈을 가늘게 뜨면 노력이 가상하다는 듯 서휘의 얼굴이 바짝 붙어왔다. 코끝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다. 길게 뱉는 숨은 뱀 마냥 서로 얽힐 터였다. 달과 같이 휜 서휘의 눈이 방원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게 제법 집요했다. 웃는 서휘와 야심한 밤, 취한 자신과 허술한 경계. 드문드문 튀어 오른 맥락들은 한 줄로 꿰이기도 전에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그림자로 스몄다.

 

“네 말하는 봉변이 무엇,”

 

느른하게 흐르던 방원의 음성은 흡, 하는 숨과 함께 급하게 삼켜졌다. 턱 끝이 추켜올려지면서 방원의 고개가 위로 향하면 휘의 입술 끝이 말간 호선을 그렸다. 기실 무해하다고 봐도 좋을 순한 얼굴이라, 방원은 잠시간 제게 일어난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이 번쩍하고 요란한 감각이 스쳐지나간 게 전부였으니. 

 

“거, 무엇이겠소?”

 

서휘의 더운 숨이 방원의 귓가를 간질이면, 곧은 정안군의 어깨가 일순 움츠러든다. 미모사가 이러할까. 엄한 소리, 매서운 눈매 한 번 내비치지 않고 무르게 입술만 달싹이는 방원이 새삼스러워 서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취중에 제 몸이 묶인 줄도 모르고 흐드러진 자리옷 목깃 사이로 날 가슴 내보이며 더운 숨 내뱉는 방원은 망종이란 별호와는 영 거리가 멀어보였다. 하긴, 방원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망종이니 광종이니 하는 소리도 순 개나발이긴 했다. 

휘의 입술이 술기운에 열이 올라 붉어진 정안군의 목덜미로 옮겨가면 입술이 가벼이 스칠 때마다 방원이 으응, 하고 얕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뉘 보아도 이는 서휘가 대군을 희롱하는 행태라. 보는 눈이 없기 망정이었다.

 

“네 말하는 봉변이, …너구나.”

 

방원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더운 숨을 느리게 뱉으며 대답하면 서휘는 대답대신 손을 내려 방원의 허리께를 훑었다. 등 뒤로 모아진 방원의 손이 움찔하였으나 붉은 다회多繪로 단단히 고정한 것이 어디 쉽게 풀리겠는가. 팔을 움직여 방원이 얻어낸 거라곤 제 양팔이 자유롭지 못하단 사실 뿐이었다. 취중에 습관처럼 글 한자 읽고자 보료에 앉았던 기억이 마지막이니, 깜빡 잠든 사이 들어온 이놈이 몰래 기어들어와 대범한 짓거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 지금 보니 잠들기 전까지 마주보고 있던 서안이 이제는 등에 닿아있다. 마땅히 묶을 자리가 없으니 몸을 돌려놓은 게지. 발칙한 놈이로고.

방원이 몸을 뒤채면 목재 서안이 아귀가 뒤틀릴 듯 작게 우는 소리를 냈다. 고운 야장사로 짠 백색 자리옷은 저 내킬 대로 벗겨낸 참인지 방원의 몸에는 옷고름이 풀릴 듯 말듯 흐드러진 저고리만 간신히 꿰어져 있었다. 저고리가 길어 아랫도리 훤히 드러내는 면괴한 상황은 모면하였으나, 휘가 단단한 손길로 방원의 몸태를 어루만질 적마다 옷이 흐트러지니 나신이 되는 것도 곧이지 싶었다. 

 

“지난날에 대군이 말하지 않았소.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이천우는 아직 발아래니 중히 쓰기 어렵다. 형 양우와 더불어 충성을 맹세하나 담이 작고 기질이 탐욕스러우니 훗날 쓰기 맞춤이도록 무릎까지만 닿게 하여라.’라고.”

“……기억한다.”

 

방원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휘의 손이 이제는 방원의 맨 허벅지를 역으로 쓸어 올려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려는 참이기에 그랬다. 휘야. 만류하듯 서휘를 부르는 방원의 목소리가 제법 유약했다. 지금 제 음문을 무엇이 채우고 있는지 알면 더욱 우는 소리를 할지도 몰랐다. 기대감에, 서휘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게 누가 그리 곤히 주무시랬소? 속으로만 애꿎은 방원 탓을 하면서.

 

“숙적을 제거하고 걸림돌을 치웠소. 강원도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 자리를 꿰찼으니 남은 자리는 병조 전서 아니겠소? 큰일은 하지 못해도 병조의 봉수군과 역제를 관할하는 자리 정도는 겁박과 회유면 충분히 받아내고도 남소.”

 

이번에는 대답대신 긴 날숨과, 으응, 하는 낮은 비음이 흘렀다. 휘의 손길이 벌어진 방원의 다리 깊숙이, 야장사 아래 설핏 가려진 음문에 기어이 닿은 참이다. 흉부가 앞으로 솟고 엉덩이가 뒤로 빠지려는 방원의 몸을 잡아채듯, 휘의 왼팔이 방원의 허리를 감았다. 올가미에 걸린 짐승마냥 방원은 간신히 헐떡대고 몸을 비틀 뿐 맥을 추지 못했다.

 

“약조하지 않았소. 내 무리 없이 이천우를 대군의 무릎에 두면, 바라는 것을 들어주겠다 말이오.”

 

거짓은 아니되 허를 찌르고 들어온 약조였다. 휘가 이런 진진한 밤놀이를 원할지 방원이 어찌 알았겠는가 말이다. 몰론, 두 사람 얼결에 배꼽 맞추고 달포에 한두 번 운우지락 나눈 지가 햇수로 삼 년이다. 서휘가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얼굴 하고선 천하의 이방원을 뒤집었다 엎었다 앉혔다 뉘였다 밤새 희롱하던 것이 어제오늘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적나라하게 얄궂은 짓을 청한 적도 없었다. 허니 방원이 당황할밖에. 

 

“그 약조는……. 읏!”

 

휘의 손가락은 아직 입구만 가볍게 지분대는데, 아랫배보다 더 아래, 꼬리뼈 안쪽에서 자르르한 전율이 올라 방원이 잇새로 신음을 뱉었다. 이제야 선연하게 느껴지는 아랫도리의 묘한 감촉에 절로 소름이 일었다. 그저 묶어만 둔 게 아니라, 잠든 사이에…….

 

“흡!”

 

느리게라도 굴러가려던 생각을 저지하려는 듯 휘가 벌린 방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손을 놀렸다. 단단한 나무를 매끈하게 깎아 달걀마냥 모양을 내어놓은 물건 하나는 이미 방원의 음문 안에 밀어 넣어진 채였다. 동백기름을 흥건할 정도로 둘러 바르고 좁게 아물린 입구를 서서히 눌러 벌리면 방원의 다리가 오금을 구부렸다. 스읏, 하는 젖은 마찰음이 방원이 끊어 뱉는 호흡에 섞여들었다.

 

“…의사병 박문복, 기억하오? 그 형이 가끔가다 요사한 걸 만들기도 한단 말이오. 이를테면, 이런 거.”

 

말이 맺어짐과 동시에 휘가 두 번째 목각 달걀의 끝을 꾸욱 눌러 방원의 안에 밀어 넣었다. 느릿하게 삽입되던 것이 굴곡을 지나 급하게 안으로 파고들면 방원의 입에선 헛숨이 튀어나왔다. 꼬리뼈를 지나, 더 깊숙하게 밀고 올라오는 자르르한 압박감에 방원의 둔부가 절로 들썩였다. 뒤로 젖혀진 방원의 상체를 좇듯이 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휘의 입술이 다시금 열띤 방원의 목덜미를 훑었다. 맥이 펄떡펄떡 뛰는 자리가 마음에 드는 양.

 

“내 심히 당황스럽, 흐으…! 아읏!”

 

세 번째를 넣을 때는 넣어둔 알끼리 부딪히는지 달각달각 소리가 울렸고, 방원의 발가락 끝이 바짝 곱아들었다. 취한 방원의 반응은 솔직했고, 긴장이 풀어진 몸은 휘가 밀어 넣는 것을 착실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양 손이 묶인 채 붉게 열이 오른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할딱대는 정안군의 모습은 춘화집에 나올 듯 야릇한 면이 있었다. 거기에 제법 애처롭게 휘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까지 더하면 부처라도 그 육신을 탐하지 않고는 못 배길 터였다. 하여 목덜미를 지분대기만 하던 휘의 입술이 급하게 방원의 것과 맞물렸다. 방원의 입은 순순히 벌어져 휘를 받았다. 온 몸에 열이 오른 듯 얽혀오는 혀까지도 뜨거워서, 휘는 마치 방원에게 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물린 입에서 방원의 신음이 뭉개졌다. 잇새로 짓눌리고 혓바닥에 눌러 어그러진 신음들을 받아 삼키며 휘는 마지막 알을 벌어져 움찔대는 방원의 음문에 대고 힘주어 밀었다. 

 

“……!”

 

방원의 허리가 크게 펄떡이고 오금접어 구부린 다리가 바짝 긴장하며 근육이 도드라졌다. 흐트러진 야장의는 더 이상 옷의 기능은 하지 못함이라, 방원의 육신은 휘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참이었다. 젖은 비부를 매만지는 손길은 급했고, 뱃속을 채운 것이 버거워 방원은 신음했다.

 

“천천히, 밀어내보시오.”

 

그 한 문장 뱉는 시간이 그리도 아까운지 서휘는 문장이 끝나기 무섭게 방원의 입술, 귓불, 뺨이며 목덜미 할 것 없이 도톰한 입술로 열 오른 살결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뱃속에 가득 찬 생경한 물건에 방원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자꾸만 음문의 깊숙한 곳, 여린 살들이 눌리는 바람에 저릿저릿한 쾌감이 올랐다. 절로 소름이 돋고 발가락이 바짝 곱아드는 감각에 방원의 입에선 끊어 뱉는 더운 숨이 한창이었다. 

 

“내 버거워서……. 휘야, 아, 으응…!”

“힘 줘서, 응? 대군…. 천천히.”

 

방원의 아랫배를 휘의 단단한 손이 꾹 눌러 압박을 가하면 아아…! 하고 삼키지 못한 교성이 방원의 입에서 급하게 튀어나왔다. 잠든 사이에 이리저리 더듬어도 영 반응이 미미하기에 취중에 감각이 무뎌졌나 했더니, 지금 모습을 보면 아닌 듯싶었다. 앞을 정성들여 만져준 적 없어도 방원의 양물은 그 대를 바짝 세우고 흥분에 겨워 꺼덕댈 지경이었다. 휘라고 다르지 않았다. 눈앞에서 열락에 무너지는 정안군이 흐느끼는데 어찌 흥분에 아니 겨울까. 

좌등은 꺼둔 채 구석의 등잔걸이에만 불을 하나 붙였으니 사랑방 안은 흔들리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였다. 어둠에 길게 뻗은 그림자는 너울대며 하나가 둘인 듯, 둘이 하나인 듯 엉겨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사랑방의 장지문과 그 밖의 사랑채 분합문까지 단단하게 걸어 잠갔으니 방원의 소리가 새어나갈 일은 없을 터였다. 하긴, 애끓는 음성 밖으로 샌다 한들 태령만 보면 으르렁대는 천가 소리에 묻힐 것이 자명했다.

 

“…아읏, 응! 흐, 아…….”

 

이경二更에 다다른 야심한 시각, 양 손 묶이고 양 다리 오금접어 벌린 채로 야릇한 신음 뱉는 방원의 목소리가 방 안 가득이었다. 그 더운 숨결에 애가 타는지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에서 촛불이 자꾸만 몸을 배배 꼬아대고, 그림자는 뱀인 양 쾌락귀인 양 아가리를 쩍하니 벌리고 자꾸만 정안군을 삼키려 들었다. 어둠 속에서 휘의 눈에 까만 욕정이 끓었다.

오로지 제 위에 계신 것은 주상 한 분이나, 그 주상마저 끌어내리기 위해 옥좌에 올린 이가 방원이라 하였다. 앞을 막는 자 반드시 꿇리고 베어서 제 아래, 혹은 그 아래보다 더 밑, 여섯 척 흙속에 묻어주는 이가 이방원이다. 방원의 품에서 머리올린 기생이 십 수 명은 넘고, 취한 방원이 던져 깨트린 술잔만 수십이다. 지엄하신 임금조차 다섯째를 내심 두려워하여 멀리하니, 천지신명도 방원만은 어찌하지 못하리라, 다들 그리 알았다. 허니 어느 누가, 한낱 천출이, 군량미를 착복한 팽형인의 자식이 방원을 이토록 쥐락펴락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거, 절경이네.”

 

벌린 다리 사이, 작게 아물렸던 옥문이 벌어지면서 젖은 알 하나가 기어이 굴러 나오면 휘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방원이 자신에게 온전히 져 주기로 작정한 듯싶으니 천천히 지금의 상황을 즐기자 싶다가도, 발씬대는 아랫도리 사정이 급하여 몸을 가만 둘 수가 없었다. 본디 백색이던 방원의 저고리는 열기와 질척한 공기를 머금고 젖어가는 참이었다. 방원의 팔과 상체에 엉망으로 감긴 자리옷에 열 오른 붉은 살결이 희미하게 비쳤다. 하여 절경이었다. 발칙한 소리임을 알면서도, 휘는 그 외의 다른 말로는 지금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방원은 휘의 어휘를 나무라는 대신 고개를 모로 돌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드러난 귀가 붉었다.

젖은 음문이 작게 빠끔대다 기어이 두 번째 알을 밀어내면, 방원의 발꿈치가 밖으로 밀리며 보료를 구겼다. 위로 치켜든 턱에 곧은 목이 훤히 드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서휘의 이가 방원의 숨통을 물었다. 늑대에 용이 물린 형상이라. 방원은 여린 목을 강하게 옥죄듯 살덩이를 이로 뭉개는 휘의 행동에 탄성과도 같은 신음을 뱉었다. 물린 곳에서 흥분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휘의 왼손이 방원의 복부를 누르고 반대 손이 젖은 비부를 문지르고 비볐다. 뱃속의 이물감이 선연하게 느껴지면 방원의 음성이 아, 아…! 하고 밖으로 튀었고, 단단한 손이 뭉근하게 젖은 입구를 벌리며 희롱질을 하면 목소리는 꼬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흘렀다. 옳지. 달래는 휘의 목소리와 함께 세 번째를 밀어내면서 방원은 기진하여 휘의 품에서 몸을 늘어뜨렸다. 사흘 꼬박 산을 타고, 두시진 내내 임금을 배알하고자 기다려도 안색하나 변치 않던 것과는 상이한 모습이었다. 휘의 앞에서 방원은 무르고 약했다.

 

“내, 힘들어서…. 휘야, 내, 더는…….”

“하나 남았소. 하나 더, 무사히 낳으시면 내 대군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소.”

 

강인한 꺼풀이 하나 벗겨진 방원의 입에서 기어이 애원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어디 휘가 만만한 인사던가. 제 아랫도리 고정하여 맨 허리띠를 풀고 단단하게 고개 치켜든 양물을 반쯤 드러내고서도 휘의 목소리는 흥분을 잘 잡아 누른 채였다. 그저 방원의 상체를 훑는 입술만이 그 주인의 감정을 흘려내듯 급하고 진득했다. 취기가 올라 붉었던 방원의 피부 군데군데 휘가 남긴 자욱이 선연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가 방원의 사람이 아니라 방원이 저의 사람 같아서, 휘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서휘의 그림자가 방원을 덮었다. 길쭉하게 뻗은 검지와 중지가 방원의 음부를 벌리면 애액에 젖은 마지막 목각 달걀하나가 끄트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보료 위 세 개의 알 역시 동백기름인지 방원의 액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 뒹굴고 있었다. 진득한 자극에 방원의 양물은 당장에라도 파정할 듯 위태했다.

 

“흐, 아으, 읏! 응……! 휘야, 아…. 내 이것 말고…….”

“말고?”

 

휘의 손끝이 느리게 알을 밖으로 긁어내자 붉게 열 오른 방원의 눈가가 기어이 젖었다. 자극이 과하여 견디기 버거운 탓이다. 달싹대는 방원의 입술에 제 입을 가볍게 마주 댄 휘가 이어질 방원의 말을 보챘다. 시선은 집요할 만큼 이방원의 젖은 눈매에 고정된 채였다. 잡아먹을 듯 이글대는 까만 휘의 눈동자는 사랑채에 내려앉은 어둠과 닮아있었다. 끓어 넘치는 검은 욕망을 방원이 마주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방원이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가쁘게 문장을 맺었다. 

 

“내…. 너를, 원한다…….”

 

토해내는 솔직한 욕망의 말미에 제발이란 말이 얼핏 섞인 듯도 싶었으나, 곧 이어 맞물린 입에 모든 언어가 뭉그러졌으니 아무렴 어떠랴 싶다. 연유는 몰라도 가슴은 벅차서, 휘는 짐승마냥 거칠게 목울대를 울렸다. 대군이라는 두 음절이 혀에 통 올라오지 않아서 그저 진득하게 입을 맞추는 게 휘로서는 최선이었다. 

 

“읍! 흐읏, 응! 아……! 휘야, 아…!”

 

젖은 옥문을 거칠게 벌리고 들어간 것은 휘의 양물이었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굵은 기둥이 붉게 열 오른 속살을 헤집고 들어가면 방원의 허리가 바짝 곤두서고 양 다리가 휘에게 감겼다. 두 몸이 하나로 겹쳐져 급하게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방원의 팔이 묶인 서안이 체중에 끌려 삐걱 여도 신경조차 쓰지 못할 만큼 둘은 급하고 애달팠다. 한참을 희롱하여 부드럽게 열린 방원의 안을 휘가 거칠게 밀어붙이면 강제로 숨이 몰린 방원이 우는 소리를 냈다. 파도마냥 들이닥치는 쾌감에 체면이니 점잔이니 하는 것을 차리기는 버거웠다. 휘의 이름을 부르고, 신음을 토해내고, 흐느끼다 다시금 휘의 이름을 부르면 호응이라도 하듯 휘는 방원의 목덜미를, 귓가를, 그 입술마저도 이질을 하여 자국을 남겼다. 

휘의 허벅지와 방원의 둔부가 부딪히는 소리는 음탕하고 난잡하여 그림자들조차 부끄러운 듯 몸통을 깊게 수그릴 정도였다. 겹겹이 닫힌 사랑채의 문이 떠도는 열기를 잡아 가두니 벗어나지 못한 체온들이 다시금 휘와 방원에게 덕지덕지 붙었다. 얽힌 몸을 따라 호흡이 겹치고 시선이 맞부딪혀 그윽하게 서로를 잡아 가두는 형국이었다. 남전도 반정反正도, 임금도 옥좌도 모조리 머릿속에서 밀려나고, 오로지 빈자리에 서로만 가득한 순간이었다. 타오르는 한 때는 불꽃마냥 뜨겁고 급했다. 

대군…….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듯 휘가 방원을 불렀다. 닿지 못할 자리를 향해 뻗고자 하는 손처럼 음성이 애달팠다. 진진한 애욕에 맥을 추지 못한 방원은 대답이 없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방원은 그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방원의 깊숙이 휘가 토정하였고, 동시에 방원이 몸을 버르르 떨며 절정을 맞았다. 감내하기 어려운 쾌락에 기어이 방원의 몸이 늘어지면 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 품 안의 정안군을 홀린 듯 응시했다. 자신의 품에서 온전히 무방비한 정안군의 모습이었다. 방원의 손목에 기어이 벌건 흉을 남긴 붉은 다회多繪를 풀어낸 휘가 흐드러진 방원의 머리칼 위에 나붓하게 입을 맞췄다. 밤이 늦었소. 곤히 주무시오. 휘의 마지막 입맞춤에 담긴 진심은 방원도 휘도 알지 못할 터였다. 

여전히 밖은 잠잠했으며 조선 천지를 뒤엎은 어둠은 긴긴밤의 애욕 정도는 감춰주려는 듯 묵직했다. 

 

 


막동莫同: 세종대왕의 아명

백로白露: 24절기 가운데 열다섯 번째 절기

초경初更: 19~21시

야금夜禁: 야간 통행금지

다회多繪: 여러 겹으로 합사한 명주실로 짠 끈

Posted by 백은수

 

[PMC: The Bunker] Markus x Ahab

 

 

 

우리는 악연이자 질병이고, 폐허이자 공허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자에게 에이헵은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잘 될 리가 없다고. 너도 말했잖아. 우리는 같이 좆 된 것뿐이라고. 에이헵이 말을 삼켰다. 입으로 뱉으나, 뱉지 않으나 다를 바 없었다. 피가래가 끓는 목에선 가르랑 가르랑 쇳소리가 났다. 세상은 여전한 흑백이었다.

 

* * *

 

이백경은 선천적 색맹이었다. 명암으로 구분되는 흑백의 세상에서 그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았다. 정확한 통계치는 매년 바뀌기도 하거니와, 본래 이백경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에는 통 관심이 없어 인류의 반이 색맹인지, 그보다 적은 수가 색맹인지, 아니면 80퍼센트가 색맹인지 그는 무지했다. 얼마 전에 60퍼센트라는 얘기를 본 것도 같았는데. 작열하는 하얀 태양빛과 먹색의 그림자가 밀려나는 흙바닥을 응시하며 이백경은 까만 신발 코로 바닥을 툭툭 걷어찼다. 관심 밖의 것들에 그는 때로 무섬증이 일 정도로 무심했다.

더러는 이것을 낭만이라 불렀고, 더러는 운명이라 불렀으며, 더러는 순리라고 했다. 이백경은 이것을 일컬어 불편이라 불렀다. 이 세상은 비효율적인 불편을 안고 살아가도록 설계가 되었다고, 그는 종종 불만을 토로했다.

 

“저는 조금, 그런 게, 로맨틱한 것 같지 말입니다.”

 

유독 백경의 앞에서 말을 더듬거리던 놈이 어쩐 일로 자기주장을 세웠다. 담배 끝을 앞니로 걸쳐 물고 라이터를 찾던 백경은 눈썹을 꿈틀하며 ‘그래?’하고 반문했다. 백경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고 눈을 마주칠 자신은 없었는지 동희의 시선은 애매하게 아래로 깔려있었다. 어렴풋한 시선의 끝에는 백경의 까만 신발 코가 걸려있었다. 햇볕에 반짝대는 모래알이 몇 개가 붙어있는 군화였다. 백경은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로맨틱은 무슨 로맨틱……. 야, 21세기에 색맹 치료법이 사랑인 게 말이 되냐? 그리고, 뭐. 이름? 야, 너 그러다가 네 운명의 상대 이름이 이마빡에 대문짝만하게 발현되면 어쩔래?”

“아, 그, 그건…….”

“그래도 로맨틱이라고 할래? 너도 당장 피부 이식수술부터 찾아볼걸?”

“…….”

 

주머니를 뒤져도 라이터는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어디 흘렸나, 백경이 얕게 인상을 찌푸리면 옆에 멀거니 서서 어물대던 놈이 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백경이 익숙하게 고개를 모로 틀며 바람을 막으면, 녀석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길게 한 모금을 빨 때, 종이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소리가 자글자글했다. 태양에 끓는 흙의 소리와 닮은 것도 같았다.

 

“너는 담배도 안 피우는 애가 라이터는 꼭 들고 다니더라.”

“그거야…….”

“그거야?”

“대위님이, 피우시니까…….”

 

말끝이 흐려졌다. 똑바로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문장에도 백경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기특한 짓 하는 놈을 그런 걸로 구박할 만큼 백경은 딱딱하지 않았다. 귀여운 놈. 생각은 손으로만 삼키고, 백경은 단단한 손으로 저보다 작은 놈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놈의 어깨가 바짝 굽었다. 겁을 먹은 것처럼 녀석은 수줍음을 떨곤 했다.

이백경의 담배 끝은 빨갛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옆에 선 놈의 눈에는 하얀 심지 속에서 붉게 타서 검게 죽는 불씨가 선명했다. 하늘은 회색이었다. 놈은 애꿎은 신발만 흙바닥에 지익지익 긁어냈다.

 

“…그래도 가끔 궁금은 하더라.”

 

길게 두 모금을 빨아 담배의 삼분의 일 가량을 태워 없앤 이백경이 불쑥 화제를 던지면, 아직도 어린 티가 덜 빠진 놈이 한 박자 늦게 ‘예?’하고 반응을 보였다.

 

“색깔이란 거. 궁금은 하다고.”

“아…….”

“동희 너도 색맹이랬나? 한 번도 색이 보인 적은 없고?”

 

백경이 물었고, 동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어어. 입 안에서 작은 웅얼거림이 뱅뱅 돌다 삼켜졌다. 백경의 담배 끝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희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눈앞의 색을 애써 무시했다.

인생에 둘도 없을 인연의 이름이 피부에 새겨지는 세상. 사랑에 빠진 자들에게만 색깔이 허용되는 세계. 이백경은 선천적 색맹이었으며, 유동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색맹이 흔한 세상. 무채색 제품의 소비량이 가장 높은 세상. 더러는 이를 낭만이라 불렀고, 더러는 순리라고 불렀다. 동희가 제 옆의 사내를 응시했다. 담배 끝은 새빨갰다. 아직 하늘은 회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백경을 중심으로 동희의 세상은 색이 번지고 있었다. 로맨틱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동희는 생각했다.

 

“…예. 그렇지 말입니다. 색맹.”

 

로맨틱은 비참을 포함하기 마련이었다. 동희는 시야에 들어서는 색상이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종류임을 알았다. 이백경은 부드러웠지만, 그의 선은 명백했다. 이백경이 동희에게 그어준 선은 아끼는 부하라는 울타리였다. 벗어나면, 이백경은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직은 하늘이 회색이기 때문에, 자신이 한 말이 마냥 거짓말은 아니라고 동희는 자위했다. 백경의 눈은 애매한 회색지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희의 손목에는 작은 점자가 흐리게 번지던 시기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두 달 전이기도 했다. 죽은 동희의 손목에는 ‘이’ 라는 단 한 글자만 간신히 적혀있었다.

 

* * *

 

태어난 사람의 몸에는 이름이 적힌다. 살면서 마주할 중요한 인연을 미리 알려주는 이정표에 가까웠다. 이름이 나타나는 시기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었으나, 부모의 발현 시기가 자식에게 유전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백경의 아비는 마흔 줄에 들어서야 이름이 나타났다고 했다. 그의 어미는 죽을 때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혹은 그녀가 비밀리에 부친 것일 수도 있었다. 백경은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았다.

이백경의 아버지는 복사뼈 위에 이름이 드러났고, 그것은 백경도 그의 어미도, 심지어는 아비조차도 읽을 수 없는 아랍어였다. 살면서 마주할 가장 중요한 인연은 때로 단 한 번도 마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백경이 어릴 적 부모님의 싸움이 일면, 백경의 아비는 스무 살 적에 당신 이름이 드러났다던 사내랑 결혼하지 그랬냐며 백경의 어미에게 어깃장을 놓았다. 백경의 어미는 그럴 때면 아비의 발목을 가리켰다. 아주 비행기타고 운명의 상대나 만나러 가라며 그녀가 일갈했다.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백경은 모른 척 제 방에 틀어박히곤 했다. 운명의 상대니, 색깔이니 하는 것들은 삶의 불편에 불과했다. 몸에 드러나는 이름이 정확히 서로를 가리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운명의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같은 나라 사람이기는 한지, 같은 언어권이긴 한지, 나이대가 비슷하긴 한 건지. 모든 정보는 불분명했고, 변수는 많았다. 이후에 들어본 바에 의하면 백경의 아비 몸에 새겨진 것은 전형적인 사내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의 아비는 평생을 통틀어 사내와 정을 통한 적이 없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름은, 일상에 녹아들면 그저 부부싸움의 소재밖에 되지 않았다. 백경이 아는 한에선 그랬다.

그래도 부모님이 두 분 다 색약이라고 하셨죠? 아비의 납골당 옆자리에 어미를 안치시킬 때 들었던 질문이었다. 백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운명의 이정표라면, 색상은 감정의 온도계에 가까웠다. 색맹으로 태어난 자들은 마음에 누군가를 온전히 담고 나서야 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한계는 존재했다. 마음에 담았던 상대의 생이 끝나면, 존재하던 색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흑백만 잔여 했다. 잔인한 세상이었다.

저에게 주어진 이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색은 채도가 낮은 상태로 머물렀다. 운명을 거스른 벌이라도 주듯, 색상은 온전하게 시야에 담기지 않았다. 이 어디에서 낭만을 찾을 수 있다는 건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백경의 부모는 평생에 걸쳐 선명한 색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잠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이 그렇게 삶을 살았다. 주어진 이름과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단 한 순간도 선명한 색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백경은 이를 불편이라고 불렀다. 그는 색맹이었고, 색을 몰랐으며, 이름은 드러날 기미가 없었다.

백경은 불만하지 않았다. 에이헵이 되던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흑백의 세상을 살았다. 이름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 * *

 

“대장! 왜 저 새끼를 굳이 데리고 오는 겁니까? 예? 자기 팀도 파는 새끼가 나중에 우리라고 못 팔겠어요?”

 

최이현이 길길이 날뛰었다. 에이헵에게 그가 목청을 이토록 높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에이헵은 담배를 입에 물고, 기름 라이터로 끝에 불을 붙였다. 그는 더 이상 라이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길게 담배를 빨며 미간을 찌푸렸고, 최이현은 작게 욕을 씹어뱉었다. 최이현은 마쿠스에 대한 에이헵의 비이상적인 관심을 유독 불편해했다. 그는 종종 짐승마냥 감이 좋았다.

아마도 본능적인 적색경보가 들어온 모양이지. 마쿠스란 놈이 워낙에 위험해보이니까. 에이헵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대장은 자신이었고, 이현은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이헵은 동료를 배신한 마쿠스를 제 곁에 들였다. 에이헵의 결정을 모두가 탐탁치 않아했다.

 

“내가 언제 잘못된 결정으로 팀 말아먹은 적 있어?”

“하지만, 대장. 차라리 지금이라도 처리하는 게…….”

“최이현.”

“…….”

“결정했다. 저 놈은 우리랑 같이 간다. 좋은 동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사냥꾼은 되어 줄 거야.”

 

에이헵의 결정을 밀어붙였다. 최이현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는 답지 않은 에이헵의 특별대우가 억울한 모양이었다. 팀은 웅성거렸지만, 에이헵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차림으로, 여기저기 거즈를 붙인 마쿠스는 그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이현과 에이헵을 번갈아 응시하는 중이었다. 본부로 돌아가는 수송차량은 시끄럽고 날이 서 있었다.

제럴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먼저 에이헵을 말렸어야 정상인 놈이 그 날은 에이헵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뭐라도 한 마디 해 달라는 듯 드미트리가 신발코로 제럴드를 툭툭 쳤지만, 제럴드는 어깨를 으쓱하는 게 끝이었다. Maybe. It will be fine. 제럴드가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법한 대답은 아니었다. What? 드미트리가 되물으면 제럴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에이헵이 만족스럽다는 듯 작게 코웃음을 쳤다.

마쿠스의 시선은 여전히 에이헵에게 박혀있었다. 그는 대다수가 환영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뻔뻔스러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신히 지혈이 됐는지, 목덜미에 둘둘 말아대고 있던 거즈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물이 멈췄다. 폭탄이 조금만 더 가까이서 터졌더라면 숨통이 끊겼을 법한 상처였다. 마쿠스는 그르렁대는 숨을 몰아쉬었다. 죽기에는 너무나도 생동하는 짐승의 숨소리였다.

에이헵에 이어 제럴드까지 같은 의견을 보이자 이현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제럴드까지 용인한다면 더 이상 반기를 들 놈이 없었다. 블랙 리저드를 움직이는 가장 큰 두 축이 아니던가. 씨발. 욕을 삼킨 이현은 마쿠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마쿠스는 그저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이 팀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난리 통에 너덜해진 에이헵의 바지의 찢어진 틈 사이로 하얀 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마쿠스는 제가 겨눴던 다리에서 나던 타격 음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카강 소리는 날카로웠다. 사람의 다리에서는 날 수 없는 소리였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던 완벽한 팀의 불완전한 대장이라니. 걷잡을 수 없이 돋아나는 흥미에 마쿠스는 미소를 참기가 어려웠다. 덜컹대는 수송차량 안, 빛을 받아 반사되는 에이헵의 다리는 흰색이었으며, 마쿠스의 손을 적시는 피는 짙은 회색이었다.

Did you see it? 에이헵이 남들의 시선을 피해 제럴드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제럴드는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마쿠스의 목덜미를 응시했다. 지혈만 간신히 한 터라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상처가 크고 깊었으니 흉터도 그만큼 크게 자리할 게 분명했다. 새 살이 돋아 망가진 살점 위를 덮으면, 마쿠스의 목덜미에 대한 비밀은 제럴드와 에이헵만의 것이었다. 격전 중에 마쿠스의 스카프가 흘러내리고, 연이어 터져나가는 폭탄들 틈에서 제럴드는 그의 목덜미에 문신처럼 자리한 문자를 발견했다. 읽을 수 없었으나, 익숙한 모양의 문자였다.

진입하던 에이헵이 순간적으로 우뚝 멈춰선 것도 제럴드와 같은 것을 목격한 탓이었다. 마쿠스가 에이헵의 다리를 쏠 수 있었던 빈틈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움직임을 멈춘 적 팀의 대장. 마쿠스는 총을 갈겼고, 에이헵의 다리에 맞은 총알이 카강카강 소리를 냈다. 대응사격은 에이헵이 아닌 이현의 몫이었다. 주인을 지키는 충직한 델타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목덜미 털을 바짝 세운채로 마쿠스를 노렸다. 에이헵은 기둥 뒤로 몸을 숨겼고,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하얀 살결 위, 저보다 한 뼘은 훌쩍 큰 사내의 목덜미에 새겨진 것은 틀림없는 저의 이름이었다. 수 년 전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던 이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에게 닥쳐왔다. 이백경. 선명하게 새겨진 세 글자가, 에이헵을 사로잡았다. 낙하산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죽어도 만나지 못했을 상대의 목에 새겨진 저의 이름이, 벅찼다.

에이헵은 숨을 몰아쉬었고, 수세에 몰려 죽음을 목전에 둔 마쿠스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다른 모든 팀원을 팔아넘길 것. 마쿠스는 숨을 헐떡였고,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을 뒤덮고 흘러내리는 피에 이름은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에이헵이 모는 배는, 그렇게 마쿠스의 고래를 사냥하고야 말았다. 그래, 마치 소설 백경처럼.

마쿠스 목덜미의 큰 상처는 얼룩덜룩하게 새살이 돋아나 흔적을 남겼다. 붉은 흉터였다. 마쿠스는 거울 속 자신의 목에서 붉은색을 읽어냈다. 단 한줌의 무채색도 섞이지 않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 * *

 

에이헵의 예상대로 마쿠스는 에이헵의 곁에 꽤나 진득하게 머물렀다. 손쉽게 제 팀을 버렸던 놈 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마쿠스는 충성을 바쳤다. 종종 어깃장을 놓고, 성질을 부리고, 폭력적으로 굴긴 했어도 마쿠스는 블랙 리저드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에이헵의 주변을 맴돌다 마침내는 최이현의 자리까지 독식하고야 말았다. 아귀처럼, 마쿠스는 에이헵의 주변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저만을 남기려 들었다.

괜찮겠어? 기어이 버티지 못한 이현이 떠나던 날, 제럴드가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에이헵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떠나는 놈 보다야 마쿠스처럼 죽자고 붙어있는 놈이 차라리 낫지, 안 그래? 제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쿠스는 그저 붙어있는 것으로 만족할 사내가 아니었다. 기어이 모두 삼키려 들겠지. 불안감이 단전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제럴드는 말을 아꼈다. 속단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하다면, 마쿠스는 자신을 버리지 못할 거라고, 에이헵은 생각했다. 마쿠스에게 작용하는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인력은 자신이 될 테니까. 에이헵은 틀리지 않았다. 마쿠스는 에이헵을 집어삼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제럴드는 마쿠스의 선을 넘는 집착을 걱정했으나, 에이헵은 개의치 않았다. 관계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한, 마쿠스는 옴짝달싹하지 못할 터였다. 마쿠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에이헵의 침대에 기어들어가는 일 정도였다. 강제성이 다분한 행위였지만, 에이헵은 어느 정도 그의 만행을 묵인했다. 마쿠스는 자신에게 각인되었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운명에게 인력을 느끼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하고 싶지도 않은 인력이었다.

마쿠스는 에이헵을 찾아들었고, 찢어내듯 옷을 벗겼으며, 성급하게 의족을 뜯어냈다. 에이헵은 으르렁 거렸고, 마쿠스는 입맛을 다셨다. 병든 관계였다. 에이헵은 꿈에서 추락했고, 마쿠스는 꿈에게조차 에이헵을 양보하지 않았다. 마쿠스는 에이헵이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그를 탐했다. 마쿠스는 에이헵의 목덜미에 울긋불긋하게 남는 저의 흔적을 선명하게 읽어냈다. 보라색으로 든 멍, 붉은색으로 남는 자국. 충혈 된 눈과 노란 뱀이 수놓아진 그의 겉옷까지. 마쿠스는 에이헵에게서 색을 읽었다. 에이헵을 중심으로 색상은 퍼져나갔다. 담배 끝이 붉게 타올랐고, 하늘의 푸른색에 장악 당했다. 마쿠스는 에이헵의 목 조르길 좋아했다. 조르는 순간 숨이 막혀 시뻘겋게 열이 오르는 얼굴색이 좋았고, 이어 남는 푸르스름한 자국이 마음에 들었다. 마쿠스는 눈앞을 장악하는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

에이헵이 색을 보게 될 수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변화는 문득 찾아왔다. 마쿠스가 팀에 합류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시기였고, 지수가 임신을 한 지 삼 주쯤 되던 시기였다. 완벽한 흑백의 세상에 점점이 색깔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완벽하던 무채색에 그렇게 오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You……. Your eyes are, …blue."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건만, 에이헵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익숙하게 저를 밀어붙이는 놈의 번득이는 눈은, 파란색임을. 안광을 형형하게 흩뿌리는 투명한 눈은 분명한 푸른색이었다. 그건 ‘파란색’이라고 부르는 빛의 영역이었다. 에이헵은 숨을 삼켰고, 마쿠스는 우뚝 멈춰 섰다. 터져나갈 것 같은 긴장만이 맴돌았다.

마쿠스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분을 삭이지 못한 탓이었다. 너도 결국은 아빠라는 거지? 응? 그렇지? 대답해! 에이헵! 그놈의 아이가 뭐라고! 애가 뭐라고! 마쿠스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에이헵의 결혼에도, 자녀 소식에도 결연했던 것은 오로지 에이헵의 세계가 흑백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에이헵의 눈에 색이 스미기 시작했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졌다.

자식이 생긴 부모가 불현듯 서로에 대한 유대가 깊어지는 일은 빈번했다. 흐리던 색이 더욱 선명해지고, 생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종종, 에이헵과 같은 색맹이 색약의 영역으로 들어서기도 했다. 마쿠스는 눈앞에서 저의 것을 빼앗겼음을 인지했다. 끊임없이 물어뜯고, 핥고, 빨아내면서 그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자신보다, 문득 발생한 아이라는 존재가 에이헵에게 더욱 중하다는 사실을 마쿠스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분노했다. 푸른 눈의 안광이 번득였고, 흰 자에는 붉은 실핏줄이 돋았다. 색깔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에이헵은 그의 머리칼이 어지러운 금발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쿠스의 목덜미는 붉은 흉터가 크게 번져있었다.

에이헵은 당혹을 금치 못하고 마쿠스의 분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이헵은 지수를 떠올렸다. 아직은 부르지도 않았던 배를 떠올렸다. 낮에 통화하던 목소리를 되짚고, 그저께 들었던 임신 소식을 되짚었다. 마쿠스가 으르렁거렸다. 에이헵은 토할 것처럼 울렁이는 속에 애써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어지럽게 번졌다가 도로 사라지길 반복하는 색깔들에 멀미가 일 것 같았다. 아직 이름조차 없는 아이가, 자신을 색맹에서 끌어냈다는 생각을 하면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분노에 겨운 마쿠스가 스탠드를 집어던져 깨트리는 소리에 달려온 제럴드가 상황을 진정시켰다. 에이헵은 멍하니 의자에 걸터앉아있었다. 제럴드의 옷은 카키색이었다. 언제나 옅은 회색인 줄만 알았던 옷이.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돋아나는 색에 에이헵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색상의 향연이 감당하기 벅찬 탓이었다. 마쿠스는 드미트리까지 합세하고서야 간신히 진정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이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얇은 눈꺼풀로 가리기에는 맹렬한 시선이라, 에이헵은 마른침을 삼켰다. 눈을 감은채로, 에이헵은 애써 지수를 떠올렸다.

 

"You'll pay for this."

 

마쿠스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격정적으로 울컥울컥 뱉어지는 참이었다. 에이헵은 눈을 뜨지 않았다. 결국엔 괜찮아질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애써 위안했다. 정작 그 역시 시간에 치유 받은 적이 없음에도.

마쿠스의 탐욕을 간과한 것은 큰 실수였다.

 

* * *

 

She's giving a birth. 그 말에 입 꼬리를 비틀어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윤지의에게 기대 절룩거리는 에이헵의 얼굴을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란한 폭탄소리와, 번쩍이는 폭발들 사이에서도 마쿠스의 목소리는 선명한 환청으로 다가왔다. 에이헵은 기대어 걸었고, 윤지의는 에이헵을 부축했다.

On a day like today? 자신이 맥켄지에게 던지던 질문에 마쿠스가 얼마나 희열을 느꼈을지 에이헵은 곱씹었다. 멕켄지에게도, 에이헵에게도, 마쿠스에게도 오늘은 중요했다. 멕켄지에게는 맥그리거의 재선이 걸려있었고, 에이헵에게는 아이가 달려있었으며, 마쿠스에게는……. 그에게는 에이헵이 걸려있었다. 마쿠스는 에이헵에게 저울질을 강요했다. 말이 저울질이었지 마쿠스가 내어준 대답은 하나였다. Every man for himself. 에이헵이 뱉었던 말을 되돌려주면서 마쿠스는 모두를 버리고 저에게 오길 요구했다. 오늘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자식도, 아내도 버리고, 육 년을 함께한 동료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자신만 곁에 두라는 요구였다. 마쿠스의 탐욕은 에이헵을 집어삼키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종류였다. 에이헵은 그의 탐욕을 간과했고, 비극은 거기서 발발되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에이헵은 숨을 삼켰다. 웃음이 올라왔고, 동시에 비참이 들끓었다. 에이헵을 부축하는 윤지의의 팔은 단단했다. 둘은 같이 비틀댔으나 넘어지지 않았다. 늪처럼 에이헵을 옭아매던 탐욕은 이제야 막을 내린 참이었다. 반듯하게 펼쳐지는 수평선 너머로 버섯모양 구름이 솟아났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하늘을 찢고, 불타는 비행기가 추락했다. 갈대는 사락사락 바지를 스쳤다.

하얀 불꽃이 터지고, 회색의 바다에 격정적인 파장이 퍼져나갔다. 다리에 새로 감은 붕대에, 회색 피가 번졌다.

상대의 생이 끝나면, 존재하던 색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흑백만 잔여 했다. 잔인한 세상이었다. 웃음 끝에, 에이헵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빛의 농간을 드러내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잿빛 하늘을 보며 에이헵은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안광이 흉흉하게 빛나는 눈이었다. 햇빛 아래 부서지던 금발을 떠올렸고, 존재하던 이름이 붉은 흉터로 뒤덮였던 목덜미를 떠올렸다. 회색지대를 걸으며, 에이헵은 기억을 흘려보내려 애썼다. 그는 마쿠스가 죽었음을 확신했다. 그가 지금, 회색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에이헵은 수 년 전, 팔에 문신을 새기던 순간을 기억했다. 심장박동과 비슷한 모양으로, 팔을 길게 가로지르도록. 정말로 후회안 하시겠어요? 타투이스트가 물었고, 에이헵은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읽지도 못하는 단어였다. 에이헵은 운명으로 치부되는 것들을 그저 불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고, 글씨는 까만 심장 박동에 뒤덮였다. Маркус Дроздове. 에이헵은 읽지 못할 글씨였다. 그의 아비의 발목에 아랍어가 새겨져있었듯이, 유전처럼 에이헵은 전혀 모르는 언어의 이름을 얻었다. 그는 문신으로 위를 뒤덮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수 년 전의 일이었다.

완벽하게 푸른색으로 반짝이던 눈과, 붉은 흉터를 에이헵은 기억했다. 단 한 줌의 회색도 섞이지 않은 찬란이었다. 단언컨대 에이헵의 모든 순간 중 가장 선명하던 기억이었다.

에이헵은 바람이 살을 에던 겨울날, 후천적 색맹이 되었다. 세상은 여전한 흑백이었다.

Posted by 백은수

[PMC: The Bunker] Markus x Ahab

 

 

 

이것은 한 남자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 * *

 

빗발치는 총알과 귀를 먹먹하게 때리는 총성이 가득한 공간에서 비상조차 못한 짐승은 바닥을 기었고, 누구의 말마따나 희생자를 사냥하려는 사냥꾼은 저돌적이며 무자비했다. 난리 통에도 용케 찢어지거나 밟히지도 않고 바닥을 나뒹구는 편지봉투에는 얕은 구김이 전부였다. First Service. 도마뱀의 머리를 친 것 치고는 특색은 없었다. 오며가며 들어본 적이 있지만 에이헵이 신경 쓰지 않던 팀이기도 했다. 돈 주면 어디든 가는 용병 집단이 가리는 장소가 어디 있겠냐만, 블랙 리저드는 동아시아로 내려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번에야 CIA가 개입한 일이라 그렇다지만, 에이헵은 영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일은 받길 꺼려했다. 카를로스가 이유를 물었을 때, 에이헵은 취향의 문제라고 일축했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활 중에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른다. 잘못 뒹굴었던 날은 턱을 찧어서 다섯 바늘을 꿰맸다.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뼈에 문제가 없길 천만 다행이라고 의사가 그랬다. 당시의 에이헵은, 아니, 이백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인 게 맞는지. 이미 다행인 것이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다행일 일이 뭐가 있냐고. 그는 의사에게 분풀이를 할 만큼 사리분별에 어두운 이는 아니었다. 턱에 거즈를 대고, 목발을 짚고, 그는 절뚝였다. 이백경이라는 존재가 잘린 다리에서 자꾸만 새어나갔다. 이대로라면 곧 죽을 거라고, 이백경은 생각했다.

극복하지도, 그렇다고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그는 도피를 택했다. 이름을 갈고, 옷을 바꿔 입고, 사상까지 들어내면서. 놓으셔야 합니다! 포기하셔야 합니다! 외치던 목소리들보다 더 크게. 더 먼저. 그는 앞서 말하고, 나서서 외쳤다. It's every man for himself.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하듯 굳이 입 밖에 그 문장을 내고서야 그는 만족했다. 블랙 리저드에 신입이 들어오며 거쳤을 작은 관문이자 연설이기도 했다. 넘어지고, 비참하게 기어 다니는 것에 이골이 나 굳은살이 박힌 팔꿈치나, 옅은 흉터가 남은 턱을 손으로 쓸어내며 에이헵은 오른 발목의 통증을 견뎠다. 존재하지 않는 부위는 종종 그렇게 통증으로서 제 부재를 드러내곤 했다. 병원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썩어 들어가는 정신은 술로 다스렸고, 밤마다 튀어 오르는 악몽은 더 많은 총질과, 더 많은 사상과, 더 많은 실적으로 꾸역꾸역 짓눌렀다. 고래가 썩어 들어가는 바다에 에이헵은 커다란 포경선을 띄웠다. 그 놈의 고래가 다시금 나타나 수면을 흐리면 언제고 작살을 꽂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헉.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에는 틈이 생겼다. 단순한 호흡이 아니었다. 과거의 악연은 생각보다 질기고 난폭해서, ‘하필이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에이헵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골통을 뒤흔들었다. 예를 들면, 마쿠스가 총을 쥐고 거침없이 걸어 들어오는 순간 말이다. 마쿠스의 걸음소리와 귀를 드드득 긁어내는 바람소리는 정확히 일치했다. 닥쳐올 앞날이 퍽 밝지 못함을 암시하는 비극적 장치라도 되듯.

에이헵은 뒤로 몸을 물렸으나 제법 우스운 꿈틀거림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놈의 속도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에이헵은 총구와 눈을 마주쳤고, 마쿠스는 총구를 통해 에이헵과 눈을 마주쳤다.

마쿠스대신 총구가 고함을 질렀다. 마쿠스는 발길질로 망가진 에이헵의 다리를 걷어차는 대신, 더욱 살벌하고 단단한 총알로 의족을 망가트렸다. 에이헵은 그것이 일종의 분풀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숨이 턱 막혀서 어떤 소리도 내기가 힘들었다. 조금만 총알이 빗나가면 왼쪽 다리가 고스란히 오른다리의 전철을 밟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남은 한 쪽 다리는 안 돼. 그것만은 안 돼. 죽음의 문전에서도 에이헵을 지배하는 것은 삶이 아닌 다리에 대한 미련이라서, 그는 아직 탄이 남은 총을 들지도 못하고 바짝 얼어있었다. 다리는, 더는 안 돼. 이백경이 소리를 질렀고, 고래가 요동을 쳤으며, 작살을 쥔 선장은 빗발치는 총알에 정신이 혼미해 키를 잡지 못했다. 혀뿌리에서 쓴맛이 올라오고, 어지럼증이 도졌다. 도피는 수년에 걸쳐 에이헵의 오랜 친구가 되었다. 견딜 수 없는 일에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것을, 에이헵은 각자도생이라는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하곤 했다.

마쿠스가 마지막 한 발이 남은 총을 다시 위로 겨누었다. 죽겠구나.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에이헵은 고개를 들어 바짝 언 표정으로 마쿠스를 마주했다. 심하게 골이 난 표정이었다. 언젠가 그 빌어먹을 다리 때문에 그렇게 될 줄 알았지. 마쿠스의 말에 에이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다리 때문에 이 꼴이 날 줄 알고 곁에 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결함이 농담거리가 될 수는 있어도 핑계거리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쾅. 마쿠스가 방아쇠를 당기면 마지막 한 발이 에이헵을 향해 달려들었다.

헛숨에 가까운 음성이 튀어나간 것 같았으나, 에이헵은 제 입에서 탈출한 음성이 어떤 부류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제가 낸 소리가 놀람에서 기인했는지 고통에서 기인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어깨가 불타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고개를 젖혔다. 관통 당했나, 뼈가 부러졌나? 판단할 지식은 충분했으나, 여유가 없었다. 에이헵이 총을 놓친 것을 확인한 마쿠스는 그의 왼 발목을 움켜쥐었다. 매가 사냥감을 채어가듯이. 다리가 위로 들리며 잡아당겨질 때, 어깨를 감쌌던 에이헵은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켜쥐었다. 총알이 파고든 허벅지가 당겨지며 통각이 아우성을 친 탓이었다. 러그가 깔린 바닥에서, 마쿠스는 거칠게 그를 당겼다. 사냥감을 움켜쥔 자의 행동이었다. 살아있는 에이헵을 끌고 가며 본인의 등을 노출하는 것은 허점이 아니라 자신감에 가까웠다. 에이헵이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가진 몸짓이었다. 실로 에이헵은 그랬다. 선장은 키를 놓쳤고, 풍랑은 맞은 배는 좌초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바닥에는 질질 끌려가는 에이헵을 따라 흔적이 남았다. 시체라도 끌고 간 것 마냥 지익 지익 그어진 핏자국은 요란했다. 에이헵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찰랑대는 힙 플라스크를 한껏 꺾어서 들이키는 마쿠스의 얼굴이었다. 웃고 있었다.

 

* * *

 

죽은 듯이 사흘 밤낮을 내리 잠으로 보냈다. 전해들은 이야기였으니 시간은 그보다 길수도, 짧을 수도 있었다. 에이헵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모든 정보는 마쿠스를 통해 가공되고 포장되었다. 에이헵은 불만할 수 없었다. 그는 작살 끝에 고래의 등뼈가 걸린 것을 알았다. 작살은 제가 쥐고 있지 않았다. 마쿠스는 선장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고래의 등에 작살을 꽂았다. 흰 고래가 비명을 지르면 우레 같은 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에이헵의 어깨는 무사했다.

병이 들었다. 관계도 사람도 모조리 병이 들어 썩고 곪았다. 도려내고자 하면 남는 부위가 없을 정도로 환부는 깊고 넓게 문드러져있었다. 에이헵은 제럴드를, 드미트리를, 마르셸의 생사를 묻지 않았다. 마쿠스가 남긴 에이헵의 일부는 해당 질문을 던질 목소리가 없었다. It's every man for himself. 마쿠스는 에이헵의 그 부분만을 도려내서 들고 나온 참이었다. 마쿠스의 입장에서 ‘이상하게 구는’ 에이헵을 제거한 채로. 에이헵은 선택권이 없었다. 마쿠스는 여전히 그를 대장이라 불렀고, 에이헵의 침대 옆엔 거금이 든 봉투가 놓여있었다. 50대 50. 마쿠스는 일방적인 제안을 이행했다.

어차피 죽었을 거라고, 내가 아등바등 하든 말든, 모두 죽었을 거라고. 에이헵은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각난 스스로를 억지로라도 이어 붙이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에이헵의 어깨 상처가 아물고, First Service에서 보낸 새 의족이 도착할 동안 그는 질긴 악연으로 조각난 저를 이어붙이고, 옭아매고, 감쌌다. 로건의 얼굴은 기억에서 어렴풋했다. 3/40 min. 노란 포스트잇을 둥글게 채우던 글씨는 선명했다. 에이헵이 유일하게 안부를 묻는 것은 지수였다. 마쿠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She's fine.”

 

에이헵은 단촐한 문장의 참 거짓을 판별하지 못했다. 진통이 왔을 텐데, 비행기 티켓을 끊고 어느 세월에 빠져나왔는지, 논리적으로 따져보지 않으려 그는 안간힘을 썼다. 마쿠스는 에이헵을 잘 알았다. 그는 죽지도, 맞서지도 못할 인간임을 알았다. 혼자 힘으로는 악몽에서 기어 나오는 것조차 어려워서 조국도 이름도 버리고 온 사내가 아니던가. 이번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마쿠스는 에이헵의 유약함에 배팅했다. 그는 다시금 회피를 택할 테고, 그로인해 더욱 저처럼 거듭나리라고. 마쿠스는 이를 완성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에이헵은 그것을 파괴라고 여기고 싶어 할 테지만.

마쿠스는 다정했다. 그는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순간에, 여유를 부렸다. 에이헵의 머리를 쓸어준다든지, 폭력 없이 그를 달랜다든지. 에이헵이 종종 일으키는 발작과도 같은 폭언과 분노는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닌 양 치부되곤 했다. 마쿠스는 입 꼬리를 과하게 당겨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곤 했다. 왜 이래, 진정해. 별 일 아니잖아? 에이헵은 빠르게 식었다. 제가 어떤 짓을 하든 팀원들은 모조리 죽었을 거라고, 에이헵은 생각했다. 멕켄지는 폭탄을 터트릴 계획이었고, 주변엔 중화기를 지닌 놈들이 벙커를 포위하고 있었다. 가망 없는 싸움이었고, 결과는 빤했다고 에이헵은 생각했다. 그래, 모두 다 죽는 것보단 마쿠스와 저라도 살아난 게 다행이었다. 본인 목숨은 본인이 챙겨야하는 법이다. 남의 뒤나 봐줄 여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에이헵은 삼 주가 지나고 나서 침대 옆에 놓여있던 현금 봉투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마쿠스는 그에게 외출을 허락했다.

술에 취하면 마쿠스는 에이헵을 뜯어먹을 듯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에이헵은 그르렁거렸고, 둘은 우위를 점하려는 짐승들 마냥 낡은 침대위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벌였다. 끼익 끽하는 소리는 괴기스러웠고, 낙후된 동네의 금이 간 건물 속에 옆방의 이웃은 얇은 벽에 발길질을 했다. 방음이 되지 않는 집에서, 마쿠스는 에이헵의 의족을 뜯어내듯 벗겼다. 회사에서 새로 지급한 의족은 첫 싸움터에 나가기도 전에 마쿠스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을 뒹굴었다. 잔 흠집이 났지만,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엎드린 에이헵이 거친 숨을 토악질처럼 뱉어내면 마쿠스는 입 안에서 맴도는 욕설을 거칠게 뱉어냈다. 가끔은 침대 헤드에 에이헵의 머리가 쿵쿵 처박혔고, 더욱 드물게는 둘의 몸이 바짝 붙어선 벽을 지지대삼아 움직이곤 했다. 벽에 에이헵의 등이 통째로 부딪히는 날이면, 그는 헐떡거리며 신음을 삼켰고, 마쿠스는 쾌감에 전율했다. 옆방에선 벽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쿵쿵대는 울림은 벽을 따라 에이헵의 등에 닿았다. 마쿠스는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침대 헤드에 걸어놓은 돌격소총을 꺼내들곤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는 요란했고, 다른 소음이라 오인할 수도 없게 명확했다. 와중에도 마쿠스는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고, 에이헵은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옆방의 분노는 금세 사그라졌다. 경찰을 불러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마쿠스와는 제격인 동네였다. 에이헵은 그에 물들었다.

 

 

"How about Red Scorpion?"

 

담배 끝을 이로 씹으며 길게 숨을 들이쉬던 에이헵에게 마쿠스가 물었다. 나름 고심한 티를 내긴 했지만 에이헵은 가차 없이 'Nah.'하고 역겨운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에이헵은 일반적으로 마쿠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불만족스러워했다.

 

"That sucks."

 

수초도 걸리지 않아 튀어나온 평가에 마쿠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White whale, Black lizard……. You love those kind of names, aren't you? Matching color with animal."

"Then why? Why Red scorpion?"

 

심지 끝이 타들어가다 영 입에 물기 버겁게 짧아진 담배에 에이헵이 인상을 찌푸리면, 마쿠스는 익숙하게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대신 가져가 울퉁불퉁한 시멘트벽에 비벼 껐다. 복귀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날이었다. 죽은 이들을 추모하지 않았다. 마쿠스는 에이헵을 몰아붙였고, 길들였으며, 어쩌면 제게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It is most lethal scorpion species in the world. Not bad."

"Still don't like it."

"Then you can have a team 'Pink Rabbit' or 'Orange Cat' or something like that."

 

에이헵이 인상을 구겼고, 마쿠스는 낄낄대며 웃음을 삼켰다. 그는 여전히 붉은 색이 띠처럼 둘러진 힙 플라스크를 들고 있었다. 에이헵을 위한 돈 봉투가 놓여있던 자리에는 각종 보드카와 양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빈병은 방 한 구석 모아져선 더러는 굴러다녔고, 그 주변엔 마쿠스가 비벼 끈 에이헵의 담배꽁초가 굴러다녔다. 낙후된 도시, 무너져가는 건물, 낡은 방의 천장에는 마쿠스가 쏘아댄 총이 고스란히 자국을 남겼다. 에이헵은 개조된 의족과 함께 개조된 총을 지급받았다. 어깨에 무리가 와서, 한동안은 더욱 경량화 된 무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걱정 마. 마쿠스가 말했다. 어깨에 무리를 느낄 새도 없이 모조리 죽여줄 테니까. 에이헵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Yes, Markus. You should be.

웃음소리는 낄낄대는 마쿠스와 흡사했다.

에이헵은 여전히 꿈을 꿨다. 동희를 붙잡고, 추락하는 낙하산과 함께 그는 공중에 얽매여있었다. 놓으셔야 합니다! 무전기가 소리쳤다. 이것을 악몽으로 분류해도 좋을 지, 에이헵은 매일 밤 고민했다. 에이헵은 추락이 시작되면, 망설임 없이 사내를 놓았다. 저 멀리 낙하하는 몸뚱이를 내려다보면서, 에이헵은 저의 낙하산에 단단히 매여 있었다. It's every man for himself. 에이헵은 중얼거렸고,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미터 너머, 낙하산 없이 바닥으로 추락한 동희의 머리가 퍼석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꿈은 그렇게 끝이 나곤 했다. 에이헵은 눈을 뜨면 마쿠스의 술병을 들이켰다.

팀원을 새로 꾸리기 삼 일 전, 새벽녘에 잠에서 깬 에이헵은 마쿠스를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잠긴 목소리로 What? 하고 묻는 그에게, 에이헵은 말했다.

 

“We‘ll keep going on the name of Black Lizard."

"Wha?"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마쿠스가 되물었다.

 

"The Black Lizard. That's our team name."

 

마쿠스가 길게 하품했다. 에이헵은 그가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They are just a tail."

"Who?"

"The teammates."

"What about me?"

"So do you."

 

마쿠스가 아무렴 어떻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Okay. Finally, you are really yourself, now. 마쿠스가 중얼거렸다. 만족에 찬 목소리였다. 죽어버린 모두를, 그저 잘라낸 꼬리로 뭉뚱그린 에이헵이 퍽 마음에 든 모양새였다. 그만 자자. 그는 도로 등을 돌리며 몸을 뒤척였고, 에이헵은 천장에 수두룩한 총알 자국을 직면하며 자리에 누웠다.

 

* * * 

 

이것은 한 남자의 추락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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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은수

[PMC: The Bunker] Markus x Ahab

[PMC: The Bunker] Logan x Ahab

 

 

 

 

Yo, intern. Think carefully. What do you want to do with captain?

 질문이 머리를 때리면, 로건은 입을 다물었다.

 

***

 

단어가 세분화되고 교집합이 자꾸만 생기면 혼란은 거기서 야기되는 법이다. 아마 자신의 혼돈 역시 교묘한 교집합에서 도출되었을 거라고, 로건은 회고했다. 말이 좋아 회고였지 이는 후회일 수도 있었다. 오래되지 않은 과거를 되짚을 때 생기는 새파란 후회. 로건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고 짜부라진 폐에는 통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냐고 물으면, 글쎄. 초콜릿 바? 시발점은 그게 아닐까. 에이헵이 툭 던져주던 그 1달러짜리 간식 말이다. 단순한 간식거리이자 힘내라는 응원이었다. 로건이 받아들이기로는 그랬다. 설령 에이헵이 주머니를 뒤져 남아도는 음식을 처리한 거라고 해도, 로건에게는 그 에너지 바가 꽤 큰 위로가 되었으니까.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에이헵은 로건의 사수로 마쿠스를 배정했다. 누가 봐도 상성의 사람을 붙여준 의도는 에이헵만이 알 일이었으나, 통보를 들은 마쿠스나 로건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을 보면 둘의 편의를 봐 준 결정은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차라리 제럴드, 하다못해 호세나 페드로도 있는데 어째서 제가 저런 놈의 사수를 맡아야 하냐며 마쿠스가 투덜거렸지만, 에이헵은 그 불평을 묵살했다. 서로에게서 좀 배우라고. 에이헵은 일축했다.

마쿠스는 영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굴었다. 그냥 공도 아니고, 럭비공같이 고약한 녀석 말이다. 어느 날은 불콰하게 취해선 기분 좋게 웃어대다가, 다음 날이면 얼굴을 잔뜩 구기고 사격 연습을 시킨답시고 사람을 세 시간 꼬박 굴리기 일쑤였다. 로건은 불합리한 처사에 입을 닫고 있을 양반은 아니었으나, 어디 PMC 같은 집단에 법이 통하고 규칙이 세워져있겠는가. 서열이 규칙이고, 대가리의 말이 곧 법이었다. 에이헵이 마쿠스더러 로건을 보라 하였으니 그게 법이었고, 로건보다 서열 높은 마쿠스가 시키는 일은 규칙이었다. 애초에 해킹 실력을 인정받아 들어오게 되어선 총질이나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마쿠스가 필요하다하니 로건은 별 수가 없었다.

에이헵은 자주 자리를 비웠다. CIA와의 비밀스러운 회담을 위해, 무기 거래를 위해, 가끔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 아내를 보러가기 위해. 에이헵이 자리를 비우면 공석은 제럴드의 차지였다. 그러기 위해 세워둔 알파였으니, 이의를 제기하는 놈은 없었다. 심지어 그 왈가닥 마쿠스 역시도 제럴드가 임시로 차지한 대장 자리에는 불만이 없어보였다.

에이헵이 숙소에 머무는 일은 적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돌아가는 걸 모를 정도로 둔하지도 않았다. 그는 눈치가 기민했고, 적재적소에서 끼어들 줄 알았다. 수컷들의 무의미한 드잡이 질이 커질 때, 늘어지는 분위기를 틀어쥘 사람이 필요할 때, 녹초가 되도록 훈련을 받고 어깨가 쳐진 신입을 응원해 줄 때. 에이헵은 그 순간마다 매 번 자리에 있었다. 놀라울 만큼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늘어진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불쑥 내밀던 초콜릿 바. 퍽 다정한 건넴이었다. 에이헵의 주변에 졸졸 따라다니는 사내 열댓 명이 항시 존재한다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 그랬다. 주변 득실한 놈들 틈에서 갈피 못 잡는 인턴 하나 챙겨주는 행동이, 로건은 제법 기분 좋았다. 울타리 안에 들어있는 기분이기도 했고, 믿음직한 등을 보고 설 자격을 얻은 것 같기도 했다. 특히나 제가 소속된 곳이 에이헵같이 유능한 대장의 품이라면.

블랙 리저드는 모두 대가리가 제법 꼿꼿한 편이었다. 6년간 어떠한 실패도 없던 팀. 불구의 동양인이 이끄는 완벽한 팀. 명성은 제법 자자했다. 맥켄지가 고된 일에는 한결같이 블랙 리저드를 고를 정도로. 에이헵의 빈틈은 제럴드가 채웠고, 팀 알파는 그런 제럴드의 수족이 되었다. 브라보와 찰리는 에이헵의 눈과 귀가 되어 움직였다. 그리고 델타는…….

델타는 오로지 한 명. 마쿠스뿐이었다. 에이헵의 다리.

로건은 어째서 에이헵이 마쿠스에게 그런 중책을 맡겼는지 알 수 없었다. 실력이야 확실하다지만, 종종 마쿠스는 에이헵의 말을 비꼬거나 비웃었다. 충성심이라는 게 있을까 싶은 모습. 종종 제럴드와 반목하는 모습을 보면 의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이제야 겨우 병아리 딱지를 뗀 로건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에이헵은 동경 받아 마땅한 대상이었다. 그가 다리를 잃기 전에는 더욱 빛이 났으리라는 걸, 로건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난리 통에 의족이 부러져 마쿠스의 부축을 받아도, 에이헵의 기상은 꺾이는 법이 없었다. 로건의 눈은 에이헵을 좇았다.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건네주는 초콜릿 바 따위가 설렜고, 목소리에 청각이 예민하게 서고, 그 주변을 맴돌게 되는 일렬의 행동들이 동경에서 기인하다고 여겼다. 감정의 교집합에서, 로건이 고른 감정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 어떤 날과 비교해도 어색할 것 없는 하루였다. 전조가 없는 비극처럼 하루는 시작했다. 에이헵은 네댓 개 들어온 제안서를 추려내는 중이었고, 옆에 붙은 제럴드는 에이헵이 볼 서류들을 먼저 훑어내고 있었다. 애초에 서류와는 상성이 좋지 않은 놈들이 많거니와 불법체류자들에게 서류란 무쓸모에 가까워서, 에이헵은 보통 며칠에 걸쳐 모아둔 것들을 제럴드와 날을 잡아 정리하곤 했다. 대부분이 오퍼였고, 드물게 장비 대금청구를 서면으로 보내는 놈들이 있었다. 에이헵은 자주 지루해했고, 제럴드는 가벼운 농담으로 숨을 돌렸다. 마쿠스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로건을 신나게 굴려댄 참이었다. 마쿠스는 주로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끌어다 앉고, 그 긴 다리를 쭈그리듯 구부린 채, 허리를 숙이곤 해바라기 씨를 까먹곤 했다. 바닥에 널린 껍질은 결국 또 로건이 치우게 될 터였다.

로건이 땀범벅이 되고서야 소금기가 묻은 손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마쿠스는, 가도 좋다는 듯 손만 휘저은 게 전부였다. 마치 다마고치를 데리고 지루한 시간 때우기를 끝낸 사람마냥. 로건은 입술이 절로 비죽 튀어나왔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말을 섞어봤자 말려드는 게 저라는 사실은 이전에 깨우치고도 남았다. 그저 욱신대는 근육을 붙잡고 샤워실로 들어가는 게 로건의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

충격적인 일은 때로 뇌리에 강인하게 박히기도 하지만, 가끔은 통째로 기억이 휘발되는 것처럼 흐려지기도 하는 법이다. 이번 것은 둘 다 해당되는 일이라, 사건은 기억에 남았고, 장면은 안개가 낀 시야마냥 뿌옇게 잔상만이 남았다.

아마, 그래. 뜨거운 물로 몸을 천천히 닦아내며 로건은 생각을 정리했었다. 입 안으로 문장을 나열하기도 하고, 상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해 보기도 했다. 사수를 바꿔달라는 요구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마쿠스가 시키는 일들은 꽤나 강한 체력을 요구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항상 같은 프로토콜로 돌아가는 훈련은 굳이 마쿠스가 없어도 될 정도로 나날이 몸에 익었고, 로건은 기왕이면 단순 노동, 그 이상의 것을 습득하길 바랐다.

샤워를 마치고, 주린 배를 통조림 캔과 패스트푸드로 때우고 나면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애매한 밤이 닥쳤을 무렵이라, 노을 끝자락이 지하로 쑤셔 박히는 와중이었다. 숙소가 조용한 것을 보면, 한바탕 서류 작업을 끝낸 제럴드가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팀을 데리고 펍이라도 간 게 틀림없었다. 에이헵이 같이 갔을지는, 확인해봐야 알 일이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몇 시간 전까지 에이헵과 제럴드가 서류뭉치와 씨름하던 사무실이었다. 있을 리가 없지. 일이 끝났는데 그 자리에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에이헵이 아니었다. 이미 불이 꺼진 사무실을 확인한 로건은 얕은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을 노려야 하는데, 내일도 에이헵이 숙소에 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피곤해서 쉬고 있을지도 몰라. 야트막한 생각이 사고회로를 스쳐지나갔다. 혹시 모르니 캡틴 숙소에 들려보고, 그가 깨어있으면 말이라도 건네자는 생각을 했다. 잠들었으면, 내일 아침에 얘기하면 될 일이었다. 로건이 짐작한 상황은 두 가지였다. 그가 자고 있거나, 깨어있거나. 사실 둘 이외의 상황이라고 해 봐야 자리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로건이 간과한 것은, 혹시라도 깨어있는 에이헵이 무엇을 하고 있을 지였다. 큰 사실을 간과한 셈이었다.

에이헵의 방문은 애매하게 닫혀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본디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숙소는 낡고 허름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훈련장이나 체력단련실만 신식에 가까웠고, 숙소는 밤중에 난방이 꺼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에이헵의 숙소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밀어 닫힌 문은 체중을 실어 누르지 않으면 달칵, 하고 걸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질 않았다.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이었다. 아마 잠갔다고 생각했겠지. 이후에 생각해보면 그랬다. 문을 잠갔으되 제대로 닫히지 않았을 뿐이다.

방문 너머로는 인기척이 들렸다. 음성이라기 보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벽과 문에 가로막힌 소리는 막혀서 방 안을 돌았고, 로건이 틈으로 들을 수 있는 소음은 한정적이었다. 의심 없이 로건은 문고리를 잡아 밀었고, 아귀가 맞지 않아 애초에 제대로 닫힌 적도 없던 문은 미끄럽게 입을 벌렸다.

 

……!”

 

우읍, . 이불에 처박힌 놈이 삼켜내듯 내지른 소리가 푹신한 침구에 파묻혀 스러졌다. 이러니 밖으로 새어나올 소리가 없는 것이다. 캡틴, 하고 부르려던 로건의 입은 벌어지지도 못하고 굳을 수밖에 없었다.

끼익. 작게 스프링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로건의 정면에는 대가리를 이불에 쑤셔 박고 엎드린 에이헵이 있었다. 양 팔이 사납게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하게 설 정도로 바짝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등은 한껏 움츠리듯 바짝 굳었고, 으르렁거리듯 목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소리가 읍읍대는 소리와 맞물려 이불 속으로 먹혀들어갔다. 땀에 절은 나체가 흠칫대며 떨리는 모습은 적나라했다.

그리고.

마쿠스가 있었다.

무릎 꿇고 엎드려 상체를 침대에 바짝 붙인 에이헵의 뒤에. 뒷무릎을 접고 허리를 세운 채로, 로건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에, 마쿠스가 있었다. 두개의 시선은 완벽한 마주치고야 말았다. 마쿠스가 허리를 가볍게 뒤채면, 그 아래 에이헵이 앓는 신음을 삼켰다. 목 너머에서 들끓는 소리를 억누르며, 쾌감에 절은 놈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더운 열기가 한가득인 방이다. 이제 막 시작한 것도, 그렇다고 끝나갈 무렵도 아닌, 격정의 중간. 로건은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로 굳어있었다. 마쿠스는, 눈썹을 반쯤 추켜올리며 흥미로운 것을 본 양 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에이헵은 아직 어떠한 사실도 모르는 듯 앓는 신음을 헐떡대기 바빴다.

모두의 대장이었고, 저의 대장이었다. 그런 자가 항상 착용하던 의족을 어디둔지도 모른 채로, 침대에 엎어져선 다른 놈의 좆을 받아내고 있었다. 실망도, 역겨움도 아닌 묘한 분노가 로건의 속에서 일었다. 경악이 뒤덮고 있는 참이라 아직은 파헤치지 못한 감정이었다. 로건은 숨을 흡, 삼켰다.

 

, 그만……. , 우윽, ! , , !”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무너진 상체를 세우려 에이헵이 팔로 침대를 밀며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마쿠스가 허리를 크게 움직이며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뒤를 박아내면 놈의 몸은 곧장 무너졌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을 보면 진작 한계가 온 것이 뻔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대부분이 신음이었고, 아주 드물게 한국말이 섞여있었다. 알아듣지 못 할 말이었지만, 알아듣지 못해도 상관없는 말이기도 했다. 이미 몇 번을 싸질렀는지 얼핏 보이는 에이헵의 성기에선 묽은 정액만 줄줄 흘러나올 뿐이었고, 의족이 떨어진 오른 다리는 이상할 정도로 정액 투성이였다. 마치 마쿠스가 부러 싸질러두기라도 한 듯이.

마쿠스는 그저 로건을 빤히 마주하다, 으레 그렇듯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유난히 눈알이 번득거리는 것도 같았다. 광기가 가득 찬 놈처럼. 로건이 진저리를 내는 눈이었다.

마쿠스가 검지로 제 입을 눌렀다. 쉬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다. 로건은 반사적으로 입을 더욱 꾹 다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음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조용한 적막이 내려앉으면, 마쿠스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에이헵의 허덕대는 숨소리는 유난히 선명했다. 로건이 알던 모습은 아니었다. 단단하거나, 때로는 오만하거나, 자신감에 차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쾌감에 절고, 녹아내려서 발정난 놈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 끙끙대는 모습이었다. 신음소리를 내는 게 달갑지 않은 지 몇 번이고 숨을 참아내는 듯싶지만, 몇 번만 마쿠스가 몸을 움직이면 기어이 견디지 못하고 아, , 단말마 같은 소리를 내뱉는 모습이었다. 로건이 알 리가 없던 모습이자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습. 마쿠스는 희열에 가득 차 웃었다.

 

“Cap. Say something. You are just crying.”

 

목소리를 이끌어낼 심산인 듯 마쿠스가 낮게 으르렁대면, 에이헵이 더욱 거칠게 성이 난 듯 그르렁, 목을 울렸다. 녹초가 되어서도 짓밟히진 않겠다는 듯 처절하기도 했다. 소름이 돋아 로건이 작게 뒷걸음질을 치면, 마쿠스가 기다리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주고 싶다는 듯.

 

“Fuckin. Stop, Mar……!”

 

갈라지고 긁혀 나오는 음성이었다. 쾌락에 절어선 더 이상 스스로를 주체하기 어려운지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음성에는 쇳소리가 섞였고, 발음은 알아듣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 마쿠스는 혀로 입술을 핥아내며 에이헵의 양 골반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목소리를 내는 놈이었다. 어떤 말을 하든, 애초에 상관없었다. 마쿠스가 허리를 크게 움직이나 싶더니, 에이헵의 몸이 앞으로 밀려날 정도로 강하게 페니스를 쑤셔 박았다. , 하고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로건에게까지 생생할 정도로.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교성. 찢어지는 소리에 가까웠다. 단단한 음성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면서 나는 신음이었다. 마쿠스가 진하게 웃으며, 허리를 재차 놀렸다. 찢어진 틈이 메워지기 전에, 에이헵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모조리 짜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 흐읍, ! 우윽, , ! 걷잡지 못한 소리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면, 로건의 몸은 후들후들 떨릴 정도였다. 마쿠스는 그제야 만족한 듯 나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로건은, 이번에도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을 조용히 닫으며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귀에는 아직도 선명한 소리가, 흡흡 대며 숨을 참는 소리,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 강하게 내뱉어지는 신음소리가 왕왕대고 있었다. 제가 무엇을 하러 이 방에 찾아왔는지는 이미 기억에서 지워지고 없었다. 로건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꾹 말아 쥐고, 한참을 닫힌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다시 처음처럼 부스럭대는 인기척에 가깝게 사그라졌다.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동경이었다. 불과 삼십분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과연 이게 동경일까? 로건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어째서 에이헵을 따라다니던 저를 마쿠스가 그리 아니꼽게 봤는지, 유독 다른 놈들보다 제가 에이헵과 친해지는 걸 마쿠스가 못마땅해 했는지. 그제야 로건은 깨달았다. 동경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던 것을 마쿠스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What do you want to do with captain? 마쿠스는 종종 질문했다. 로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뭘 하냐고, 우리 다 같이 힘을 합쳐 임무를 완수하는 거 아니냐고. 항상 그렇게 대답했다. 동경과 욕정의 애매한 교집합에서, 로건의 대답은 단순하고 1차원적이었다. 우윽, . 다시금 에이헵의 음성이 요동쳤고, 순간적으로 올라간 신음소리가 문을 간신히 넘어 로건의 귓전을 때렷다.

What do you want to do with captain? 로건이 되물었을 때, 마쿠스는 어떻게 했더라. 로건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마쿠스가 대답을 했던가?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러다 문득, 기억의 파편이 로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그래, 마쿠스는 그저, 혀를 내밀어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을 뿐이다. 그것이 마쿠스의 대답이었다.



Posted by 백은수

[PMC: The Bunker] Markus x Ahab

 

 

 

지수야, 나는……. 지수야.

기도를 틀어 막힌 사람마냥 목이 멨다. 오빠, 있잖아.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말문이 막혀 그랬다. 수화기 너머의 표정이 예상되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는 당황하고, 그녀는 참담했다. 항상 같은 주제와 같은 표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았다. 다른 이들에게 하듯이 권위로 누르지도, 말 빨로 대충 흘려 넘기지도 못하는 게 지수였다. 에이헵은 거짓도 진실도 말하지 못하고 덫에 걸린 놈처럼 낑낑대는 게 전부였다.

제발, 이번까지만 하고 그만두자, 응? 차라리 그래, 보수는 적어도 경비원 같은 일은…….

목소리가 아득했다. 통화 음질이 좋지 못해 섞여드는 노이즈가 귓바퀴를 긁었다. 끝이 뭉그러지는 말을 에이헵은 가만 듣고 있었다. 예, 아니오, 둘 중 어느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드물게 아래로 깔렸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마른 침을 삼키며 에이헵은 그저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했던 대답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집에 가서 얘기하자. 지수야.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지수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침묵, 한숨, 그리고 ‘그래.’하는 단출한 문장. 입맛이 썼다. 혀뿌리에서 비린 맛이 올라왔다. 기분은 싱숭생숭했고 손에 들린 전화기는 유독 무거웠다. 술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주머니에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쑤셔 넣고 에이헵은 목을 가다듬었다.

나 임신했어.

쉽사리 기뻐할 수 없는 무게의 문장이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애가 태어나면 돈은 더 필요할 텐데. 마트 경비 월급으론 턱도 없을 정도로. 들끓는 속내는 통 진정이 되지 않았다. 종일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에 드물게 끼어드는 한국말은 유독 다른 문장들보다 가시가 많아서, 마음속에 쿡 쑤셔 박히면 꺼내기가 영 힘이 들었다.

에이헵이 지수와 통화를 한 후 독한 술을 한두 잔 홀짝대는 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가시를 빼낼 때 기름칠을 하듯, 에이헵은 알코올의 힘을 빌리곤 했다. 주로 술은 마쿠스의 것이었지만, 주인이 있다한들 에이헵이 신경 쓸 리가 없었다. 마쿠스는 매 번 자신이 억울하게 술을 갈취당한다고 주장했고 에이헵은 술 마신 다음 날이면 그럴싸한 보드카 한 병을 쥐어 줬다. 오늘도 에이헵의 손에 들린 술은 마쿠스의 소유였다. 다만, 오늘은 한두 잔이 아니었다. 에이헵은 저의 목구멍에 병을 통째로 쑤셔 넣다시피 했다. 임신이라는 말은 기름칠이 많이 필요한 단어였다. 입씨름에 불과하던 은퇴를 목전으로 끌어당길 만큼 강력했으니까.

빈속이었지만 에이헵은 개의치 않았다. 술이라면 한국에서부터 지겹도록 마셔보지 않았던가. 강제로 받은 잔이 몇이며, 흥에 취해 부어넣은 잔이 얼마인가. 술에 죽고 못 사는 놈은 아니었지만, 진탕 마셔본 적이 없던 것도 아니라 에이헵은 주량을 가늠하지 않고 목구멍을 적셨다. 취한다한들, 침대에 쑤셔 박혀 잠이나 자지 않겠느냔 말이다.

 

“아.”

 

낮은 감탄사가 툭 튀어나왔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은 탓이었다. 바닥에 얼핏 굴러다니는 술병이 보인 것도 같았다. 손에 들려있어야 할 병이 어째서 텅텅 비어 바닥을 구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시야가 영 어지러워 에이헵이 고개를 숙이면, 이마에 툭, 단단한 온기가 닿았다. 이마에 닿는 감촉을 느끼고도 수 초간은 멀뚱히 눈을 깜빡인 게 전부였다. 머리가 버틸 수 없을 정도를 쏟아 부었으니 사고가 정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혈액대신 돌아다니는 알코올의 농간이었다.

쉬이.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오빠. 지수의 목소리가 흐렸다. 취기가 돌면 씹힌 테이프를 억지로 재생한 것처럼 기억들이 늘어지고 둔탁해졌다. 오오, ㅃ, 아. 마냥 쳐지는 기억 위에, 쉬이, 하는 잔잔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 저를 붙드는 몸이 있었다. 이마에 닿는 체온과 야트막한 목소리로 간신히 추론해낸 사실에, 에이헵이 고개를 털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행동이었으나, 뇌가 따로 굴러다니는 느낌만 받았을 뿐 정신은 영 추슬러지질 않았다. 독한 술을 무식하게 부어넣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금 등을 따라 돋는 소름.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감촉. 아. 손이다. 제법 거칠긴 해도, 등을 쓸어내리는 것은 손이었다. 맨 살이 닿는 촉감에 에이헵이 어깨를 움츠렸다. 벗고 있던가. 뒤늦게 드는 생각을 곱씹어보기도 전에, 뱃속이 꾸욱 눌렸다. 아. 에이헵이 다시금 낮게 목소리를 터트렸다. 늘어지는 몸은 간신히 상대에게 걸쳐져있는 수준이었다. 단단한 몸이 영 불안정하게 늘어지는 것을 팔을 감아 붙들지 않았더라면 진작 굴러 떨어지고도 남았을 만큼 에이헵의 몸에는 영 맥아리가 없었다. 180cm가 넘는 거구를, 상대는 용케 놓치지 않았다. 혹은, 그 정도의 덩치는 충분히 다루고도 남을 놈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Do you like it?"

 

질문하는 목소리가 제법 선명했다.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조곤조곤 속삭인 덕이었다. 에이헵이 저에게 닿은 몸을 뒤로 밀어내며 음성의 주인공을 식별하려 했으나, 헛짚은 팔 때문에 그는 도로 놈의 목덜미에 이마를 쑤셔 박을 수밖에 없었다. 취했구나. 그제야 에이헵의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다. 느린 사고는 제가 닥친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판단하질 못해서, 에이헵은 고개를 내저었다. 좋냐고 물었던 것은 같은데, 무엇에 대해 묻는지도 영 알 수 없었다.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삼켜내는 특유의….

 

"Ma, …us."

 

끊어진 발음이 알파벳을 삼켰다. 반쯤 트인 시야엔 놈의 맨 살이, 시야의 모서리에는 바닥, 굴러다니는 술병, 이불. 에이헵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다시금 뱃속이 꾹, 꾹, 눌리는 감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촉을 인식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아. 신음은 두어 박자가 늦었다.

이어 야트막하게 이어지는 자극은 영 오싹하고 간지러워서, 에이헵은 몸을 비틀었다. 단전에 열이 모이는 기분. 술기운에 늘어지던 숨이 제법 밭게 끊어졌다. 끙끙대는 소리가 목 안쪽에서 맴돌았다. 닿은 체온은 마음에 들었다. 몸을 휘감는 손길이 제법 능청스러워 뱀 같긴 해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날갯죽지를 누르고, 등줄기를 따라 흐르던 손이 둔부를 가볍게 쓸었다. 아. 다 벗고 있던가. 뒤늦게 자각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귓가에서 진득하니 떨어지지 않던 지수의 음성이 마악 옅어진 참이었다.

에이헵은 얌전했다.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어렴풋이 깨닫는 중에도 인상을 구기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도피처가 절실했으니, 마쿠스도 그에겐 감지덕지였다. 술에 취한 정신으로 판단하기엔 그랬다.

키에 걸맞게 큼지막한 손은 에이헵의 몸을 쓸었고, 둔부 사이 엉덩이 골을 파고들어 움찔대는 구멍을 꾹 눌러 벌려냈다. 중지를 한마디쯤 밀어 넣으면 둥그렇게 굽은 에이헵의 등이 반사적으로 꼿꼿하게 서며 근육들이 바짝 긴장했다. 에이헵의 몸은 단단했다. 낭창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육체. 진한 수컷 향을 뿌리고, 울부짖고 으르렁대며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에 적합한 몸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다리일까. 물론, 마쿠스는 그 다리를 퍽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었다. 에이헵의 불완전에 파고드는 것은 마쿠스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의족을 벗겨내도 반항이 없던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마주 안은 채로 손가락이 애널을 지분거려도 욕한 번 없던 것 역시,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지간히 취해도 제 앞가림은 하던 에이헵이 오늘만큼은 그럴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없던 기회도 억지로 만들어 굳이 짐승을 제 아래 억누르던 마쿠스가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에이헵은 마쿠스의 손가락이 깊게 들어와 내벽을 휘저으면 흠칫대며 울컥대는 소리를 삼켰다. 앓는 소리를 삼키는 것은, 에이헵의 오랜 습관이었다.

벌어진 입에서 더운 숨이 드나들었다. 날숨에는 독한 알코올 냄새가 뒤섞여있었지만 마쿠스는 맡지 못했다. 그에게서 일상적으로 나던 향이 아닌가. 손가락으로 넓히고 적셔놓은 애널 입구는 이제 단단한 귀두 끝이 느릿하게 비벼지는 중이었다. 마쿠스가 느른하게 숨을 내뱉었다. Hey, captain. 부르면, 저의 이름을 간신히 부르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귀두가 입구를 밀어 벌리며 삽입되면, 에이헵의 몸이 작게 움질댔다. 짤막한 오른 다리가 위 아래로 작게 흔들렸다. 허벅지 안쪽은 바짝 힘이 들어간 채였다.

차차 깊게 쑤시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취한 와중에도 제법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문신이 뒤덮인 에이헵의 팔이 마쿠스의 양 팔을 그러쥐었다. 악력은 무시할게 못 돼서, 마쿠스는 얕게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그저 붙잡고 매달릴 뿐 마쿠스를 밀어내지 않으니, 마쿠스 역시 에이헵을 떨쳐내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얌전하게 구는 저의 대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긋하게 포식하고 싶었다.

서서히 기둥이 밀고 들어가면, 아, 에이헵의 입에서 다시금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신음의 말미는 거친 숨에 섞여들어 마침표가 없었다. Do you like it? 마쿠스가 재차 물으면, 에이헵은 입을 어물거리며 밭은 숨을 헐떡거렸다.

 

"I, I don't……. know…."

 

질문을 이해하는 것도, 영어로 대답을 내어놓는 것도 느린 박자로 움직였다. 그 사이 반 이상 파고든 마쿠스의 페니스에 에이헵이 허리를 비틀었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며 불러일으키던 야릇한 감각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뱃속이 가득차서 뭉개지는 기분. 술에 녹아내린 와중에도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자극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에이헵이 양 다리를 바짝 움츠렸고, 닿아있는 마쿠스의 허리춤에 왼 다리가 감겼다. 오른 다리는 그저 작게 허우적댄 것이 전부였다.

숨은 더위 먹은 개 마냥 끊어지고, 능글한 마쿠스의 목소리가 청각을 지배했다. 술기운과 더불어 맞닿은 체온에 열이 더욱 홧홧하게 오르면 기억은 아이스크림마냥 녹아내렸다. 오빠. 오……. 목소리가 늘어지다 못해 끊어지면, 더 이상 통화 내용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저 알고 싶지 않은 고민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에이헵은 굳이 꺼려지는 기억에 집중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허리가 위아래로 작게 흔들렸다. 마쿠스가 만족에 겨워 피 끓는 신음을 그르렁거렸다.

에이헵의 머리카락은 땀에 절어 흐트러진 채였다. 마쿠스의 페니스가 뿌리까지 들어가기 시작하면 흘러내린 앞머리가 에이헵의 눈가를 찔렀다. 쯔걱.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접합부에서 적나라했다. 압박감이 심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폐를 채우는 산소는 턱없이 부족했다. 마쿠스의 페니스가 쿡, 하고 깊은 곳을 장난처럼 쳐 올리면 에이헵은 허리를 바짝 세우고 고개를 젖혔다. 머릿속을 끈적끈적하게 녹여내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반쯤 혀를 내밀고 허덕대는 중에도, 에이헵은 여전히 단단해보였다. 마쿠스의 손에 닿는 몸이 그랬고, 중간 중간 뱉어지는 목을 긁어내는 신음소리가 그랬다. 기운 빠진 놈은 여전히 피식자는 되지 못 할 짐승이었다. 잠시간 왕좌를 탈환당한 우두머리라면 몰라도, 에이헵은 쫓기는 초식동물은 되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지수의 말마따나 마트 경비로도 살 수 있었을 터였다. 에이헵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족속이었다. 날개 부러진 매가 닭과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빨이 뽑힌 사자가 토끼가 될 수 없듯이. 타고나길 포식자로 태어난 놈은, 또 다른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순간에도 뿌리를 버리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아. 우윽, 윽. 아…….

기어이 마쿠스가 뿌리 끝까지 페니스를 밀어 넣으면, 한계까지 벌어진 에이헵의 애널 입구가 움찔거렸고 틈 없이 압박당해 짓이겨지는 쾌락점에 에이헵의 앞은 축축하게 젖었다. 묽은 선액을 뚝뚝 흘려내며 성기를 꺼덕대는 광경이, 마쿠스는 만족스러워 웃음을 삼켰다. 되새김질하듯 삼킨 웃음에 어깨가 잘게 흔들리면, 같이 흔들리는 몸체에 에이헵은 뱃속을 휘젓는 페니스가 버거워 숨을 껄떡댔다.

느릿하게 끝난 삽입과 반대로, 교접은 꽤나 성급하고 거칠었다. 조이는 내벽을 견디기 힘들었고, 소름끼칠 정도로 쾌락을 몰아다주는 압박을 버티기 버거워 그랬다. 마쿠스가 에이헵을 눕히며 허리를 크게 밀어붙이면, 콱 하고 쑤셔 박히는 페니스에 에이헵이 헉, 하고 헛숨을 삼켰다. 몸이 눕혀지자 아래로 흘러내린 에이헵의 손은 침대 시트를 우그러트릴 듯 강하게 그러쥐었다. 마쿠스가 크게 허리를 움직이면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빛이 돌아오길 반복했다. 아찔한 자극이었다.

 

"Do, ya…. Fucking, like…. it?"

 

마쿠스의 물음은 끈질겼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그는 종용했다. 살이 강하게 부딪히며 퍽, 퍽, 소리가 공격적으로 울려 퍼졌다. 둔부에 강하게 닿아오는 마쿠스의 허벅지와, 벌어진 입구를 단숨에 쑤시고 들어가는 페니스에 에이헵의 벌어진 입에선 더운 숨과 신음이 섞여들었다. 허리가 절로 들썩였고 바짝 선 페니스의 선단에서 쿠퍼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에이헵의 몸을 훑던 마쿠스의 손이 이제는 체중을 실어 에이헵의 하복부를 강하게 짓눌렀다. 손바닥에, 에이헵의 단단한 복부 너머 제 페니스가 느껴질 정도로 힘껏.

 

“아, 아……!”

 

압박을 견디지 못해 에이헵이 탄성을 내질렀다. 장기가 온통 짜부라진 느낌이었으며, 요의가 느껴질 정도로 아찔한 감각이었다. 마쿠스의 몸이 가쁘게 움직였다.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에 따라 삼키지 못한 에이헵의 음성이 아. 아아. 아. 끊어져 튀어나왔다. 젖은 음색이었다. 술에 절고 쾌감에 녹아내린 목소리가 꼭 흐느낌 같았다. 울음일리가 없음에도, 처음 듣는 젖은 음성은 그렇게 느껴졌다. 마쿠스는 거칠게 으르렁거렸고, 에이헵은 울부짖듯 송곳니를 드러냈다.

Answer the question. Ahab. Do you like it?

끊어지고, 먹혀들고, 흘려나가는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은 헐떡헐떡 뱉어졌다. 마쿠스는 숨이 가빴고, 에이헵은 사정이 임박했다. 아직 마쿠스의 허리에 감겨있던 왼다리가 바짝 힘이 들어가 마쿠스를 당겼다. 한 손이 복부를 누를 때, 마쿠스의 나머지 한 손은 에이헵의 잘린 다리를 우악스레 붙잡아 벌렸다. 벌겋게 부은 입구가 움찔대며 젖은 소리를 냈고, 에이헵은 양 팔로 마른세수를 하며 쾌감에 허우적거렸다. 이제는 어떤 기억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좋냐는 물음. 추궁하는 목소리. 짐승의 울부짖음. 혼재된 소음이 고막을 때릴 뿐이었다.

좋아, 씨발. 좋, ㅇ, 아, 아. 반쯤 놓친 정신이다. 에이헵의 입이 버끔거리며 말을 뱉어낼 듯 말듯 애를 태웠다. 술 냄새와 체향이 뒤섞인 공간에서 마쿠스가 몸을 깊게 수그렸다. 사정과 동시에 뿌리 끝까지 페니스를 쑤셔 박으면, 에이헵은 앞으로 움츠러든 마쿠스와는 달리 뒤로 고개를 바짝 젖히며 꺽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좋아. 씨발……. 짓이겨진 발음이라 알아듣기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마쿠스는 에이헵이 뱉어낸 단어의 의미를 알았다. 애초에 이 질문에는 답이 하나뿐이었다. 대답을 하지 않거나, 단 하나의 대답을 하거나. 에이헵의 몸이 쾌감을 주체하지 못해 버들버들 떨리면, 마쿠스는 다시 한 번 깊게 사정했다.

Posted by 백은수

[PMC: The Bunker] Markus x Ahab

 

 

 

쾅, 하는 제법 요란한 소음이 머리를 관통했다. 얼얼하거나 쓰린 감각보다는 눈앞이 어질한 게 우선이었고, 이후로 이어지는 아찔한 시각 점멸에 에이헵은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입 안에서 맴도는 욕설은 우악스럽게 붙잡힌 턱주가리가 움직이질 않으니 뱉어낼 수가 없었다. 모든 상황은 타의적으로 흘렀고, 수동적인 자세를 요구했으며, 기껏해야 그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것뿐이었다. 아찔한 시야와 더불어 에이헵은 오늘도 비참으로 떨어졌다. 익숙하고 싶지 않았으며 익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마주치면 그는 인상을 구겼다. 죽어도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Hey. Hey, hey. Don't look at me like that. We're gonna have fun tonight, captain."

 

반쯤 술에 절어있는 목소리가 이명이 울리는 귀를 간신히 스쳤다. 중간 중간 혀끝에서 발음이 뭉개지고 음성은 높낮이가 오락가락했다. 흘리듯 뱉는 말들은 경중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입을 틀어막은 손을 뜯어내려 에이헵이 안간힘을 썼지만, 머리통을 침대 헤드에 수차례 박고 반쯤 숨이 막힌 상태에서 마쿠스를 힘으로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눈에 핏발이 섰다.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아도, 절대 숙일 수 가 없는 자의 발악이었다. 마쿠스는 으레 그렇듯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고, 눈을 한껏 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눈빛으로 인사를 하듯.

 

"Don't……. Ever, …I, said……."

 

간신히 틈이 벌어지는 손을 따라 미완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그러진 문장이 마치 저의 표정 같아서 에이헵은 숨이 막혔다. 갈그락대던 소리와 함께 뜯어지듯 벗겨진 의족이 바닥을 뒹굴었다. 러그를 깔아놓은 덕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지는 않았으나 텅, 하는 묵직한 추락은 불가피한 소음이었다. 에이헵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동그라진 저의 다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Stay focus."

 

으르렁대는 목소리. 거칠게 연마된 놈의 환희가 송곳니뿐인 아가리를 벌렸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문장으로 가다듬은 구색이었다. 떨어져나간 의족으로 향하려던 에이헵의 시선은 강제적으로 도로 마쿠스에게 틀어박혔다. 옷이 구겨지고, 바지가 벗겨지는 중이었다.

에이헵은 그를 악연이라 불렀고, 마쿠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But you need me. 그는 첨언했고, 에이헵은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병이 들었다. 에이헵은 항상 혀뿌리까지 올라오는 말을 크게 삼켜내곤 했다.

육체적인 만족을 쥐어 주고 충성을 얻는 관계는 아니었다. 에이헵은 봉사할 마음이 없었고, 마쿠스는 고작 흘레붙는 것으로 저의 충성심을 줄 만큼 셈에 약한 놈이 아니었다. 에이헵은 정당하게 마쿠스를 얻었다. 궁지의 궁지까지 몰아서 얻어낸 짐승이었다. 그래, 따져보자면 마쿠스가 반드시 필요하진 않았다. 다만 그는 욕심이 났다. 콕 집어 말 할 수는 없어도, 순간적인 인력이 작용한 것은 틀림없었다. 호감이냐 물으면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호감이 아니었냐 물으면 대답하지 못 할 인력. 에이헵은 욕심이라는 단어로 복잡하게 끓던 감정을 정리했다.

마쿠스의 성장은 빨랐다. 아니, 애초에 자랄 만큼 자라있던 사람이니 기지개를 켰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Alpha, Bravo, Charlie. 그리고 종래에는 Delta-01. 코드는 2년에 걸쳐 뒤로 향했다. 마침내 정상의 곁에 다다를 때까지, 마쿠스는 느른하고 여유롭게 기지개를 켰다. 날개 잘린 매의 곁, 뱀으로 위장한 패배자 곁에 설 때 까지.

침대에 나동그라져선 나신이 된 아랫도리에 닿아오는 묵직한 감촉을 선연하게 느끼며, 에이헵은 자신이 단단히 붙잡혔음을 알았다. 이미 갈비뼈까지 파고든 놈의 발톱을 빼낼 도리가 없었다. 에이헵은 마쿠스의 목줄을 거머쥐었지만, 그 순간부터 마쿠스는 에이헵을 움켜쥐고 있었다. 복종도 반란도 아닌 회색 경계에서 마쿠스는 서성거렸고, 에이헵은 그를 굳이 굴종시키지 않았다. 짓누르면 도리어 제가 물릴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씹, 아…. 씨발, 그만, 좀……!”

 

바지 버클을 푸는 익숙한 소리. 동강이 난 다리를 굳이 쓰다듬는 손길. 짧은 손톱이 긁어내는 다리의 단면. 영어를 쓸 정신도 없었다. 급한 대로 튀어나가는 한국말에 마쿠스는 웃음을 삼켰다. 수세에 몰린 놈이 드러내는 바닥을, 마쿠스는 제법 좋아했다. 드러난 바닥에 발톱자국을 새기는 것도 퍽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미 수많은 자국이 가득한 곳이라 해도.

마쿠스의 손이 부드럽게 오른 다리를 쓸어내리다 거칠게 움켜쥐면, 에이헵이 헉, 하고 가쁜 숨을 삼켰다.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의 압박이었다. 떨어지던 순간의 칼바람, 무전기의 소음, 제가 붙든 놈의 온기, 흔들거리던 시야. 모든 기억은 동면에 든 뱀 굴을 파헤치듯 덩어리가 얽히고설켜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눈앞의 마쿠스가 흐려지고 시시각각 다가오던 파도 같은 풀밭이 스쳤다. 펼쳐졌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하강하던 낙하산과 놓으셔야 합니다, 소리치던 음성들. 마쿠스는 영악했다. 말 한 마디 없이 에이헵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만큼. 그렇게 만들어낸 정신의 균열에 저를 욱여넣을 만큼.

에이헵을 긁어내 스스로 선을 넘게 하는 것은 마쿠스가 즐기는 놀이 중 하나였다. 제가 한 도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캡틴이잖아.’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 에이헵 같은 부류에게는 꽤나 독이 될 테지만,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괜찮다고, 마쿠스는 생각했다. 기왕이면 그 독에 중독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은 덤이었다.

굳은살이 박인 다리의 단면을 움켜쥐곤, 마쿠스는 이미 단단하게 선 제 것을 에이헵의 비부에 바짝 밀착시켰다. 행동이 뜻하는 바를 에이헵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날개가 부러진 매처럼 에이헵이 몸을 버둥거렸고, 의족이 떨어져나간 몸은 중심이 잡히지 않아 휘청거렸다. 키도 완력도, 하다못해 정신조차도 수세인 에이헵의 몸짓은 제압하기 어렵지 않았다. 놈의 단단한 팔뚝도, 단단한 주먹도, 제법 강인한 정신도 지금은 영 쓸모가 없었다.

독이란 그런 법이다. 마쿠스의 독은 에이헵에게 꽤나 효과적이었다.

 

"Shhhh. I don't wanna hurt you. Just take a deep breath, sweetheart."

 

애칭은 다정했다. 무서우리만큼 다정했다.

 

"Don't, ……You, don't……. Mark…."

 

입을 틀어막은 손을 치우고 벌어진 입에 마쿠스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는 에이헵이 깨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 안을 헤집는 손가락을 깨무는 것 보다, 쪼그라들었던 폐에 공기를 밀어 넣는 게 우선일 테니까. 에이헵이 숨을 허덕대면 흉부는 크게 오르내렸고, 뒤척이는 몸에 맞닿은 아랫도리가 거칠게 스쳤다. 마쿠스가 그르륵, 피가 끓는 듯 목울대를 울렸다. 타액에 절은 손가락이 입에서 빠져나갈 때, 에이헵이 몇 마디 웅얼거리는 했으나 여전히 문장의 형식을 띄지도 못한 조악한 단어들뿐이었다. 우리 불쌍한 캡틴. 마쿠스의 말려 올라간 입 꼬리가 의미하는 바는 그랬다. 비록 진심이 단 한 방울도 섞여있지 않았지만.

왁스로 넘겨 고정한 머리가 흐트러지고, 양 가슴에 뱀 자수가 놓인 재킷이며 그 안에 받쳐 입은 검은 티셔츠는 복부 상단까지 밀려 올라간 모습이 퍽 엉망이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속옷도 걸치지 못한 아랫도리, 서지도 않은 성기. 미끄러지듯 내려다가 뚝 끊겨진 다리 한 쪽과, 속옷과 바지가 발목에 걸린 왼다리가 적나라했다. 마쿠스는 그 광경을 좋아했다. 몇 번이고 쥐고 흔들어도 다음날이면 도로 정상에 올라서서 버티는 에이헵의 모습을 좋아했고, 정상에서 끌어내려져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좋아했다. 이건 당신과 나의 암묵적인 관계잖아. 마쿠스는 입 밖에 내지 않은 질문의 답을 이미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입 밖에 내어봤자, 에이헵은 대답하지 못할 게 뻔했다. 그 역시, 마쿠스는 마음에 들었다.

에이헵의 타액으로 적신 손가락이 애널 입구를 가볍게 문지르다 급하게 파고들면, 큭, 하고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악에 받혀있었다. 포기하지 않은 듯 여전히 마쿠스를 밀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단단한 팔뚝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이미 잔뜩 진이 빠져 신음을 참을 여력도 거의 없는데, 에이헵은 포기하지 못했다. 이미 여기까지 떨어져 내린 것으로도 충분한 추락이었기에 그랬다.

적셔만 놓은 구멍을 성급하게 파고들려 마쿠스의 것이 대가리를 쿡 디밀었다. 제대로 벌어져 삼킬 수 있을지나 의문인 입구를 밀어 벌리면 두 사람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잘리듯 먹혀들었다. 마쿠스의 어깨에 멍이 들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고 밀어내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가하는 압박감이 영 견디기 버거운 탓이었다. 츠읏, 하고 기어이 벌어진 입구에 귀두를 밀어 넣으면 에이헵이 이를 악물었다.

마쿠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지금부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들릴 차례이기에.

그르릉. 으르릉. 피가래가 끓는 것 같은 소리. 악문 잇새로 나오는 비참과 분노, 겁화와 처참이 뒤섞인 소리. 제 아래 둔 놈에게 속절없이 당한다는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죽어도 굴종하지 못하는 족속들이 대가리가 꺾이기 전에 내곤하던 소리에 마쿠스는 단전 아래가 욱신거림을 느꼈다. 허리가 절로 들썩였고, 채 적응하지 못한 내벽을 더욱 벌리며 페니스는 기둥까지 파고들었다.

좁은 길을 억지로 트면 에이헵이 고개를 바짝 젖히며 헛숨을 급하게 삼켰다. 빠듯하게 복부를 채우며 장기를 밀어내는 감각을, 그는 견디기 버거워했다. 한두 번 받아본 것이 아님에도, 그는 매 번 마쿠스의 것을 받을 때면 힘겨워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점차 완벽하게 맞물려가는 몸에, 마쿠스의 상체가 에이헵에게 더욱 가까이 기울었다. 코끝이 스칠 정도의 근거리였다. 핏발 선 눈과 흘러내린 앞머리, 일그러진 표정을 제 눈에 똑똑히 새기면서 마쿠스는 길게 들숨 했다. 사내의 체향은 옅었다. 주로 탄약 냄새가 났고, 왁스 냄새가 났으며, 담배 냄새로 겹겹이 둘러싸여있었다. 마쿠스는 켜켜이 쌓인 냄새를 찢어내고 기저의 체향을 찾아내길 즐겼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고, 이질을 하면서.

츠읏, 츳. 젖은 소리를 따라 한껏 벌어진 애널 입구가 더욱 늘어나며 간신히 기둥을 삼켰다. 반 이상이 들어가면 에이헵의 숨은 허덕허덕 끊겨 나와 개가 헐떡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고, 그때부터는 눈앞이 까맣게 물들 정도로 아찔한 압박감에 그는 헛구역질하기도 바빴다. 어깨를 잡아 밀어내던 단단한 손이, 이제는 부들부들 떨리며 그저 매달리는 꼴이었다. 멍이 들 터였다. 마쿠스의 어깨와 에이헵의 목덜미에. 둘은 그런 식으로 폭력의 흔적을 공유했다.

 

“……아, 아! 으, 우윽…! 윽, 흐으…….”

 

기실 신음이라는 것에 국적이 어디 있겠냐마는, 마쿠스는 삽입의 말미에 에이헵의 입을 통해 튀어나오는 소리는 한국말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낯이 선 음색이었다. Fuck! Holly shit! 따위의 감탄사도 없는 단순한 외침에 가까운 소리. 오로지 에이헵의 입에서만, 드물게 튀어나오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를 삼키고, 흐느낌을 씹어내고 남은 잡음이었다. 보기 좋게 망가진 에이헵의 표정을 살피며 마쿠스는 다시금 에이헵의 목덜미를 강하게 물어뜯었다. 피멍을 들 게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 물어뜯는 중이었으니까. 에이헵의 애널이 마쿠스의 것을 강하게 압박하며 삼켜냈고, 마쿠스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허리 짓은 거칠었고 낡은 침대 스프링은 비명을 내질렀다. 에이헵의 고개가 젖혀지며 숨이 넘어갈듯 꺽꺽대는 소리가 났다.

덜덜 떨리는 몸은 에이헵의 통제 밖이었다. 트라우마를 들쑤시고 뇌를 헤집어 놓았으니 몸이 공포에 질린 것은 당연했다. 아마 본인은 그게 억울하고 굴욕적이라 견딜 수 없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벌벌 떨며 그르릉 대는 것 외에 에이헵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 기껏해야 그 좁은 구멍을 더욱 조여 대는 것 정도일까.

움찔대는 내벽이 마쿠스의 애액으로 질척하게 젖고, 마냥 수축하기만 하던 구멍이 점차 풀어져 움찔대면 느릿하고 큼지막하게 움직이던 몸은 교접에 박차를 가하듯 가쁘게 허리를 움직였다. 퍽,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살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고 소음의 사이사이 에이헵의 거친 숨과 마쿠스가 씹어뱉는 욕설이 뒤섞였다. 무릎까지밖에 없는 놈의 다리가 버들버들 떨리는 것을, 마쿠스의 손이 부드럽게 훑었다. 강하게 밀어 붙이면 아랫배거죽이 얕게 부푸는 것도 같았다. 단단하고 두꺼운 몸이라지만, 마쿠스와의 교접은 그 사실을 망각시킬 만큼 거칠고 깊었다.

Ahab. Captain. Ahab. Sweetheart.

이름은 몇 번이고 불려서 메아리처럼 귀를 가득 메우고, 어질어질한 눈앞에는 마쿠스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참이었다. 중간 중간 마주치는 눈은 희열에 번득거렸고, 간간히 떨어지는 땀방울이 에이헵의 위로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옷가지를 따라 화약 냄새가 벗겨지고, 뜯어지는 다리를 따라 비린 쇠 냄새가 떨어졌다. 나체가 되어 열이 오르면 지워지는 왁스 냄새와, 흩어지는 담배 냄새 아래로 옅은 체향이 맴돌았다. 마쿠스는 게걸스레 사내의 체취를 삼키고, 저의 열기로, 정액으로, 종종은 타액으로 향을 섞어냈다. 덕지덕지 붙여지는 마쿠스의 잔재들이 강제로 끄집어진 기억들 마냥 뱀처럼 얽혀들었다.

이름을 불리면 에이헵은 대답대신 아, 아. 신음을 터트렸고, 바짝 힘이 들어간 왼 다리, 발뒤꿈치가 침대 시트를 밀어내며 경련하듯 버르르 떨렸다. 엉망이 되어 추락한 놈의 가랑이 사이에서 한바탕 발톱을 쑤셔 박고 만찬을 즐기던 마쿠스는 결국엔 늘어지는 몸뚱이를 우그러트릴 듯 끌어안고 깊게 사정했다. 에이헵의 몸이 죽어가는 짐승마냥 퍼득 떨리면, 마쿠스는 다시 한 번 놈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놈의 젖은 몸에선, 알싸한 보드카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Posted by 백은수

[불한당] 조현수 x 한재호

 

 

 

공기는 축축했다. 비가 온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날씨는 공기가 젖어있었다. 조현수의 눈물은 마르지 못했다. 느리게 흐르는 눈물이 귓가로 떨어진다. 하늘은 점차 개여서 남색이 파란색이 되고, 파란색이 하늘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목이 버석버석했다. 어느 생각도 할 수 없는 적막이다. 사고는 멈추고 숨은 미약하다. 길바닥에 버려져있을 한재호는 차가울 것이다.

조현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깜빡. 그 정도였다. 삼 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눈꺼풀 너머로 보이던 푸른 공기가 단숨에 사라졌다. 그래, 마치 촛불이 훅, 하고 꺼져버리듯이. 눈가가 뻑뻑했다. 울어서인지 메말라서인지 모를 정도로 애매한 감각이다. 시트위에 바로 뉘였던 몸이 어느새 모로 돌려져 있었는지 조현수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이다.

눈을 뜨면, 하늘은 없고 누런끼가 도는 낡은 시멘트 벽이다.

코가 시큰했다. 담배 냄새다. 매캐한. 그리고, …….

익숙한.

마치 경련이라도 하듯 퍼득 떨며 조현수가 몸을 일으켰다. 놀란 몸의 어깨와 목덜미가 화드득 떨리며 소름이 올랐다. 관절이 삐걱거리고 근육이 욱신거렸다. 어딘가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총을 맞아 꿰매고 민철의 손으로 후벼파졌던 팔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눈이 뻐근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먹먹함이 조현수의 오감을 둔화시키고 있었다.

조현수는 멍이 든 눈가를 찌푸리고 머리를 가볍게 털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정면에 철창, 그 너머의 영근. 그리고 오른쪽에…….

 

“이 4m 담벼락 안에는, 딱 두 가지 종류 새끼들 밖에 없어.”

 

아.

아아.

아.

조현수의 손이 낡은 시트를 긁듯이 움켜쥐었다.

 

“건드려도 되는 새끼들. 그리고 건ㄷ,”

“건들면 안 되는 새끼들…….”

“허어?”

 

한재호의 입에서 시작해 조현수의 입으로 끝난 문장이었다. 한재호가 눈썹을 꿈틀하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치이익 소리가 요란했다. 제가 할 말을 빼앗긴 한재호는 ‘어쭈?’하는 눈빛으로 조현수를 응시했다. 조현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현수의 얼굴을 살피느라 한재호는 그 약한 떨림을 잡아내지 못했다.

조현수의 표정은 이상야릇했다. 마냥 놀라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눈빛. 한재호는 그 읽을 수 없는 감정에 골몰하듯 조현수의 눈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조현수의 눈동자에 한재호의 그림자가 졌다.

한재호의 등 뒤에서 쏟아지는 노란 달빛이, 불과 일 분 전까지 보던 푸른 하늘과는 너무나도 극명한 대척점에 선 빛이라 조현수의 눈은 어지러웠다. 3년만에 보는 한재호의 수감번호는 낯이 설었다. 질이 나쁜 보급형 재소자 옷은 서걱거렸고, 살갗을 스치는 감촉이 까슬했다. 631. 가슴의 까만 자수는 올 하나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꿈처럼 아찔하게 멍한 정신을 추르스지도 못한 채, 조현수는 입을 벙긋거렸다. 말을 하지 않으면 다시금 파란 하늘이 쏟아져내릴 것 같았으므로.

 

“그럼……. 그 쪽, 은요.”

 

조현수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나올지, 제가 어떤 대답을 할 지도. 지옥을 향해 가라앉는 느낌이 아직도 선연한데, 난데없이 지상으로 끌려나온 정신은 어지러웠다. 한재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청각마저 아득한지라 한재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조현수는 이미 대답을 들은적이 있었다. 어느 쪽 같으냐, 하고 되돌아올 질문. 날숨처럼 뱉어질 헛헛한 웃음소리. 한재호의 뭣도 아니기 이전의 제가 들었던 목소리.

왈칵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억울해서? 갑갑해서? 반가워서? 혼돈처럼 뒤섞인 감정은 정의를 내릴 수 없도록 얽히고 섥혀서 뭉그러져있었다. 코 끝이 시큰해서 조현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건들면 안되는…, 새끼들 쪽. 조현수의 목소리가 작았다. 서서히 올라오는 현실감에 목이 메는 응어리를 삼키기 어려운 탓이었다.

 

“아니. 나는 그 기준을 정하는 사람이다.”

 

한재호가 말했다.

마치 되감기한 영상을 보듯이 조현수의 기억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문장이었다.

조현수와 한재호의 눈이 마주쳤다. 조현수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한재호는 그 의미를 알 지 못했다. 눈치가 기민하고 상황판단이 빠른 한재호에게 드문 일이었다. 조현수는 미래의 감정으로 한재호를 보고 있었으니 한재호가 이해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꿈일 수 없는 생생한 감각들과 세세한 기억들의 조각 사이에서 한재호는 유유자적했다. 괜히 사고쳐서, 징역 깨지마라. 한재호가 말하면 조현수는 이를 악물었다. 돌림 노래처럼 가장 처음으로 돌아온 이 관계를 어쩔지 몰라 그저 시선을 받아내기만 하면, 한재호는 손을 가볍게 내밀며 중얼대는 것이다. 자기는 멍도 예쁘게 든다면서.

조현수는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한재호에게 총을 맞은 날 이후로, 그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마지막 날 한재호는 조현수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고 그렇게 인생의 막을 내렸다. 수천번이고 수만번이고 끌어안고 쓰다듬어주던 눈빛과는 달리 손끝조차 대지 않은채로 말이다. 조현수가 망각한 체온이다. 받을 날이 많을 줄 알아 진즉 털어낸 온기다. 한재호의 손길대신 조현수가 얻은 것은 시린 하늘과 차게 식은 운전석이었다.

한재호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조현수의 광대를 스쳤다. 조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지금, 조현수의 텅 빈 증오는 갈피와 뿌리를 모두 잃었다.

돌아나가는 한재호의 너른 등은, 저는 걸음걸이에 따라 작게 기울며 움직였다.

우리는 또 다시 여기구나. 조현수는 생각했다. 당신과 나는 밤에 시작했고, 새벽에 끝이 났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비극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임을 한재호, 당신은 알까.

Posted by 백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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