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내추럴] 카스티엘 X 베니 라피테

 

 

샘의 설명은 장황하거나 번거롭지 않았다. 그는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법을 알았고 인내심을 가지고 남을 이해시키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종종 그것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등장하곤 했는데 지금은, 이를테면, 카스티엘이 그랬다. 딘과 샘이 종말을 막아냈으니 없어졌어야 마땅할 존재인 그는, 샘의 말을 대부분 흘려들었고 딘의 말의 대부분은 빈정거렸다. 카스티엘은 항상 왼 손에 맥주병을 쥐고 어깨를 늘어트린 채 걷곤 했다. 그들이 아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천사라기 보단 술주정뱅이에 가까웠다.

샘은 몇 번이고 자신들의 상황과 계획을 카스티엘에 전달하려는 시도를 했다. 목을 가다듬고 ‘그러니까, 카스티엘…….’하고 말을 시작하면서.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예닐곱 번의 시도 끝에 샘은 깨달았다. 카스티엘은 들을 준비도 되지 않았고 귀 기울일 의지조차 없었다.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은 그는,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종말 없는 세계에서도 흐트러트린 자신을 주워 담지 못했다.

딘은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잠시나마 종말을 겪었던 그는, 카스티엘의 붕괴를 이해했다. 무너질 수밖에 없었으니 무너진 것일 뿐이다. 카스티엘에게 잘못은 없었다. 반쯤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으니 이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카스티엘은 종종 빈 맥주병을 테이블 위로 드르륵 굴리며 고서적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고군분투하는 형제를 응시했다. 눈빛에는 가끔 번뜩이는 광채가 보였다. 베니는 그런 카스티엘을 측면에서 응시하다 제 혈액 팩을 꺼내 마실 따름이었다.

카스티엘은 둘을 원망하고 있었다. 은총이 떨어진 그의 감정은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감정이 급변하는 폭은 일반사람보다 격렬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울분과 원망에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세계 중에서 어째서 자신은 ‘종말이 있는 곳의 카스티엘’인지, 왜 자신이 있던 곳의 딘은 종말을 막지 못했는지. 샘은 어째서 YES를 외쳤는지, 또 어째서 자신만이 은총을 잃고 사람이 되는 비극을 겪어야 하는지. 이제 겨우 멀쩡한 세상으로 불러내졌다 싶었더니, 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죽은 나 자신을 살려라.’ 인건지.

 

“이봐, 너희들 말이야.”

 

맥주병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카스티엘이 주의를 끌었다. 여섯 개의 눈이 동시에 그를 응시했다. 경계하는 동생,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불안해하는 형. 도통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흡혈귀. 그 모두의 눈길을 받으며 카스티엘이 목을 가다듬었다. 오른손으로 목을 매만지자 거칠게 자라난 수염이 그의 목을 간질였다. 딘과 샘이 면도기를 챙겨줬으나 그는 수염을 밀지 않았다. 마치 죽어버렸다는 이곳의 카스티엘 대체품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러니까……. 나는 ‘진짜’ 카스티엘을 불러내기 위한 소모품이라는 거잖아?”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뾰족 거렸으나 이내 카스티엘은 가시를 눕혔다. 술, 여자, 약.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한 자신에게 여자와 약이 떨어져 신경질이 일어나나보다고 대충 넘기며.

딘과 샘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조금은 곤란한 질문을 받은 사람들처럼.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랬는데. 카스티엘은 혀끝을 씹으며 히죽 웃었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때면 그 쓴 맛이 강하기 마련이었다. 카스티엘은 테이블 위에 떡하니 걸쳐놓았던 제 다리를 아래로 내렸다. 카스티엘이 다리를 치운 자리에는 흙 부스러기가 어지럽게 흐트러져있었다.

 

“니들 정말 악질이라고. 딘, 그리고 샘.”

 

말에 가시가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냥 형제는 그저 잔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을 뿐 그럴싸한 변명이나 위로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카스티엘은 여전히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조금 괴기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둘을 보며 ‘악, 질.’ 하고 입을 뻐끔거려 보인 후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행동이었다.

새집처럼 엉망으로 뻗친 카스티엘의 뒤통수가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 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딘의 신경은 곧장 샘에게로 쏟아졌다.

 

“걱정 마, 새미. 이번 일만 제대로 풀리면 멀쩡한 카스티엘로 돌아올 테니까.”

 

“비난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종말이 있는 곳의 캐스는 너무, 글쎄. 감당하기가 어려워.”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딘을 흘깃한 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할 말이 입 안에서 굴러다녔지만 베니는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말들이란 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카스티엘에 관해 자신이 할 말이 둘의 감정에 어떻게 작용될지 생각해보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내가 가서 살펴보고 올게. 딘.”

 

튜브를 통해 반쯤 빨아먹던 팩을 도로 상자 속에 쑤셔 넣으며 베니는 엄지로 제 입가를 쓸듯이 닦았다. 새하얀 백열등이 부셔지는 베니의 눈동자는 옅게 색감을 입혀놓은 구슬 같아 보이기도 했다. 부탁해. 딘이 말했고, 뒤이어 고마워, 하고 샘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샘은 베니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전처럼 적대감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목숨을 걸고 연옥으로 내려가 그와 바비를 구해낸 것은 베니였으니까. 샘은 딘이 베니를 믿는 것을 납득했다. 비록 딘처럼 그를 온전히 믿지는 못해도.

카스티엘이 들어간 복도를 뒤따라가며 베니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난 인간을 달래는 뱀파이어라니. 꼴이 점점 이상해지는데.

베니는 두근대는 심장소리를 따라 걸었다. 연옥에 있는 내내 들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물론 천사였던 카스티엘의 심장역시 박동을 하기는 했다. 다만, 단조로울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그가 달리거나 힘든 둔덕을 오를 때도, 리바이어던에게 물어 뜯겨 죽기 직전에도 카스티엘의 심장소리는 단 한 번도 빨라지거나 느려지지 않았다. 마치 정확한 기계처럼 그 몸은 최적의 상태로 굴러가고 있었다. 비록 그 외양이 더렵혀지고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지금 들리는 소리는 꽤나 가빴다. 평안한 표정에 가려진 감정의 달음박질이 격정적인 탓이었다. 베니는 소모품이라는 단어를 씹어뱉던 그 음성을 떠올리며 닫힌 방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럽고 정중한 노크였다. 약이 떨어지고 유흥거리가 줄어든 카스티엘은 제가 알던 것보다 더 신경질적이라고 딘이 중얼대던 것을 기억하며. 베니는 골이 난 사내를 굳이 더 도발하고 싶지는 않았다.

 

“샘이면 가고, 딘이면……. 가.”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먹먹했다. 두터운 철문에 가로막힌 목소리의 반은 그렇게 둔탁하게 새어나왔다. 저들끼리 뭉치고 엉겨 붙어 간신히 새어나온 소리는 본래의 음성과는 조금 다르게 변질되어있었다. 베니는 얕게 심호흡을 했다.

 

“글쎄, 뱀파이어면 어떻게 할까?”

 

“…….”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았던 곳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멀끔한 철문을 응시하며 베니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단 하나의 흠집이나, 칠이 벗겨진 자국조차 없는 견고한 문을 상대의 의견에 반하면서까지 부수고 들어갈 마음은 없었으므로. 베니는 형제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카스티엘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길 바랐다.

또 다른 카스티엘을 불러내기 위한 매개체나, 대용품 따위가 아니라.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라, 샘과 딘은 아마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형제에게 카스티엘이란 단 하나의 존재였다. 전혀 다른 평행 우주에서 넘어왔다 치더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카스티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카스티엘에게는 그런 대우가 불만의 이유가 되진 않았을 터였다. 형제가 카스티엘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주님의 천사, 목요일의 천사, 혹은 딘 윈체스터의 조력자’ 카스티엘이었으니까. 어느 곳의 카스티엘이든 그건 대부분 맞는 이야기였다. 다만, 이 녀석을 제외하고 말이다.

종말에서 건너온 녀석은 천사가 아니었다. 딘 윈체스터의 조력자라기엔 무능했다. 주님의 가호조차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어느 것도 형제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다. 딘과 샘은 실망을 숨겼어야했다. 새로 나타난 녀석의 면전에서 ‘카스티엘을 되살려낸다.’는 말을 하면 안됐다. 그것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낱 인간인 녀석이 상처받지 않고 그 말을 넘겨들을 경우의 수가 얼마나 되겠는가. 베니는 모자를 고쳐 쓰며 보지 못할 형제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육중한 문은 잠시간의 침묵이 더 있은 후에야 서서히 틈을 벌렸다.

 

“……들어와.”

 

Posted by 백은수

 

[슈퍼내추럴] 딘 윈체스터 X 베니 라피테 (오메가버스)

 

 

딘 윈체스터는 알파였다. 베니 라피테는 오메가였다. 얼핏 보면 이는 명백한 상하관계였고 더 이상 분명할 수 없었지만 자세히 파고들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정정하도록 하자. 딘 윈체스터는 열성 알파 인간이었다. 베니 라피테는 우성 오메가 뱀파이어였다. 이제 조금 더 명확해진 서열 관계가 수면위로 드러난 셈이다.

둘은 연옥에서 만났다. 연옥이란 결국 지옥의 또 다른 버전과 같아서, 죽은 자들이 득실대는 곳에서는 삶의 냄새를 전혀 맡을 수가 없었다. 꿉꿉한 습기와 진득한 구정물냄새, 역겨운 신물이 올라오고 썩은 피에 파리가 들끓는 곳. 그곳에선 죽음의 연장이냐 죽음의 끝이냐 밖에 선택권이 없어서 그보다 가벼운 문제의 것들은 너무나 쉽게 잊히곤 했다. 그래서 둘은 잊고 있었다. 딘과 베니는 일 년이다 되어가는 시간동안 서로의 형질에 대해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아마도 카스티엘은 알아차렸었겠지만, 그 순진무구한 천사는 알파와 오메가가 서로 붙어 다닌다면 주의를 줘야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게 분명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저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가 딘과 베니에게 그에 대한 충고를 해줬을지는 의문이지만.

둘은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 즉시 헤어진지라, 둘은 살아 돌아온 이후로도 서로의 형질에 대해 알지 못했다. 본업으로 돌아간 딘은 베타인 샘과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베니는 홀로 움직였다. 그의 발정기는 그 자신만큼이나 조용하게 지나가곤 했다. 우성인자를 지닌 몸은 스스로의 극단적 상황을 제대로 제어할 줄 알았다. 그가 뱀파이어라는 것 역시 그 조절에 한 몫을 했다. 베니는 마치 베타처럼 생활했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 놀음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살아생전에 그만큼 뒹굴었으면 충분했다.

딘의 발정기는 요란한 편이었다. 눈에는 핏발이 섰고 거친 숨을 헐떡이곤 했다. 제 주변에 누가 있는지조차 인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서, 샘은 종종 딘을 힘으로 진정시켜야했다. 딘은 약이 듣지 않는 편이었다. 발정기는 들쭉날쭉하게 찾아왔고, 강도는 심했다. 알파의 발정기는 오메가와 다를 게 없었다. 오메가는 알파를 찾고, 알파는 오메가를 찾는다. 본능이 그러했다. 다만 딘은 형질은 너무나도 열성이라, 그는 오메가와 베타조차 구별하지 못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도 구별하지 못했다. 샘은 카스티엘을 덮치려 들던 딘도 기억했다. 딘은 곧 죽을 듯 숨을 헐떡이며 카스티엘의 멱살을 잡았다. 언제나 딘에게만은 모든 방어를 내려놓는 카스티엘은 그저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양 손을 늘어트린 채로 말이다.

딘은 카스티엘에게 키스했다. 응하지 않는 상대를 향한 질척한 구애였다. 다물린 카스티엘의 입술을 핥고 그의 목덜미를 잘근대며 딘은 앓는 소리를 냈다. 카스티엘은 조금 당혹감이 서린 표정으로 샘을 응시했다.

‘딘이 왜 이러는 건가, 샘.’

딘의 애무를 목석마냥 고스란히 받아내며 카스티엘이 물었고, 샘은 딘을 뒤에서 잡아당겨 카스티엘에게서 떼어내는 수고를 감행해야했다. 물론 운 좋게 약효가 들 때도 있었다. 듣지 않을 때가 더 많았지만. 이것은 주로 오메가와 진탕 뒹굴고 나면 해결되는 일이었으나, 오메가의 개체는 많지 않았다. 베타와 몸을 섞어봤자 열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 여자를 사는 것도 못할 일이었다. 돈을 두둑하게 준다 하더라도 삼일 밤낮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모두들 사양할 테니.

딘의 발정기에 샘은 주로 딘의 옆을 지켰다. 그는 베타였고, 알파의 향에 반응하지 않았다. 180cm가 넘는 키의 딘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카스티엘이 딘을 돌본 것은 단 한번이었다. 그는 나무 의자에 가만 앉아 딘을 지켜봤다. 마치 하나의 실험체를 관찰하듯이 말이다. 딘은 이불을 쥐어뜯었고, 자위하듯 아랫도리를 흔들었다. 샘은 그러한 딘의 모습을 외면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카스티엘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찬찬히 딘을 관찰했고 다음날 샘이 돌아왔을 때 그 사실을 샘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얼굴이 벌게진 쪽은 샘이었다.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샘은 주의를 줬다.

딘은 자신이 거쳐 간 발정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너무나 들끓는 열이 극심해서, 기억이 남아있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하게 고통스러워하는지 몰랐다. 얼마나 노골적으로 모두에게 성교를 요구하는지도. 그는 ‘심한 몸살감기를 앓는 것 같다.’라는 샘의 설명을 믿었다. 딘은 자신이 카스티엘의 입술을 핥고 셔츠 위로 몸을 쓰다듬었던 것도, 샘을 끌어안고 아랫도리를 비비던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했더라면, 그는 스스로 목을 매달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딘은 자존심이 센 남자였으니까.

다행인 것은 딘의 발정기는 잦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발정기를 거치는 다른 알파나 오메가와는 달리 딘의 발정기는 짧게는 반년, 길게는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왔다. 불규칙한 생활 탓이 클 거라고, 딘은 말하곤 했다.

딘이 홀로 베니를 찾은 날이 있었다. 베니는 지하에서 몸을 늘어트린 채였다. 체력은 바닥을 쳤고 다리는 말을 듣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날은, 연옥에서 올라온 이래로 딘이 처음 맞게 된 발정기이기도 했다. 오메가와 단 둘이서 말이다. 베니의 몸이 미처 낫지 않았을 때였다.

베니를 짊어지다시피 하고 호텔로 장소를 옮겼을 때, 딘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꾸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숨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딘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기운이 빠진 베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그저 호텔로 가서 혈액 팩을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낮게 읊조릴 따름이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베니의 말에 딘은 어정쩡한 대답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든 탓이었다.

보통 딘의 발정기는 갑자기 몸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아파오며 시작됐다. 딘이 느끼는 증상은 몸살감기와 다를 것도 없었다. 기억이 끊기기 전까지 그는 그저 삐걱대는 몸이 시리고 아팠으며, 더워서 견딜 수 없어했다. 하지만 그 날은 무언가 달랐다. 자꾸 목이 바싹바싹 마르고 허기가 동했다. 기저에서부터 끓어오른 무언가가 왈칵왈칵 뱉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감정의 폭포인지, 본능의 파도인지 딘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친구를 남들의 시선을 피해 호텔로 옮기는데 집중하던 중이었다.

베니는 어렴풋한 단내를 맡고 있었다. 감각이 인간에 비해 수배는 예민한 그가 그것이 페로몬인 줄 몰랐던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이유 탓이었다. 그는 지쳤으며, 몸은 비린내 가득한 피투성이였고, 열성 알파의 향은 다른 놈들에 비해 연했다. 베니가 백년이 넘도록 페로몬 향을 맡지 못하고 연옥에서 살았던 것도 추가되면, 베니가 자신을 부축하는 사내가 알파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호텔로 들어갔다. 침대 두개만 덜렁 놓여있는 썰렁한 방이었다. 딘은 베니를 침대위에, 혈액 팩을 테이블 위에 얹어놓으며 숨을 돌렸다. 거친 숨이었다. 정도이상으로.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침묵이 아니라 딘의 이성이 끊기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베니는 스스로 일어나 혈액 팩이 담긴 상자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그는 숨을 고르던 딘이 갑자기 주저앉는 것을 이상하다는 듯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딘은 쨍하게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어질어질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평소와는 다른,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자꾸만 일어나려하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무렵 딘은 이것이 발정기임을 알아차렸지만, 그것을 베니에게 설명할 정신은 없었다. 이봐, 딘? 베니가 물었을 때 딘은 그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명백한 인력이 딘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온 몸이 누군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저 단순한 열기에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딘은, 아니, 딘의 본능이 베니를 원하고 있었다. 삼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풀어낼 존재를 발견한 몸은 딘의 통제를 벗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딘은 베니가 오메가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베니는 제 향을 꽤나 잘 갈무리하는 편이었고, 어디에서든 그것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발정기에 접어든 알파는 숨겨낸 향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로 페로몬에 극도로 예민해지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저를 괴롭히는 향기의 근원지를 알았다. 딘은 섹스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침대보를 움켜쥐고 아랫도리를 베게에 문지르며 견디는 것이, 오늘만큼은 불가능했다.

딘의 열이 서서히 오르면 이성은 휘발됐고, 짐승만이 그 자리에 남아갔다. 베니는 다리가 불편했으며, 최고의 무기인 송곳니와 손톱은 딘에게 절대 세우지 않을게 분명했다. 베니는 한 마리의 먹잇감이 된 셈이었다. 차라리 그가 열성이었더라면.

베니는 우성 오메가였다. 남의 발정기에 영향을 받아 발정을 맞는 형질이 될 수 없었다. 그의 발정 주기는 일정했고, 통제가 가능했으며, 남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마 베니가 작정하고 향을 풀었더라면 몇몇 알파는 속수무책으로 발정기를 겪었을 터였다. 이를테면 쿠엔틴이나 안드레아 말이다. 물론 베니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페로몬을 사용해 누군가를 휘두르는 짓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근 몇 백 년 동안은 그랬다. 철없을 적의 그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큼 침묵이 길어지고, 고통스러운 듯 끙끙대는 딘을 불안하게 보며 베니는 흐릿한 냄새를 느꼈다. 향수라고 대충 넘겨짚은 것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동시의 일이었다. 딘 윈체스터는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헌터는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사냥감에게 들켜선 안 되므로. 향수는 아니었다. 방에서 나는 냄새도 아니었다. 향기는 딘에게서 흐리게나마 흐르고 있었다. 베니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다리는 불편했다.

딘, 하고 베니가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쪼그려 앉아있던 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떡 일어난 것 치고는 휘청대는 몸이 불안했다. 그는 작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약하게 찌푸린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인데, 흐르는 기운은 전혀 달라 베니는 불안감을 드러냈다.

“이봐 대장님.”

한번 지각하고 나자 확실히 느껴지는 페로몬을 작게 킁, 들이쉰 베니가 말했다. 거부감이 하나도 없는 달큰한 냄새. 알파의 것이 분명했다. 같은 오메가였더라면 반발감이 들어야했다. 딘이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거친 한숨. 열성의 알파가 맡는 우성 오메가의 냄새는 상상 이상으로 위력적이었다. 본래 반나절은 지나야 이성이 끊기는 딘이, 수 분만에 처참하게 본성을 드러낸 것을 보면 말이다. 그의 시야는 신이 잔뜩 우그러트려 놓은 듯 일그러져 보였다. 마치 이정표처럼 농도 짙은 페로몬을 몸에 두른 베니를 제외하곤 다른 무엇도 딘의 눈에 명확하지 못했다.

딘은 그가 저의 전우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딘은 조급하게 베니에게 다가섰다. 베니는 다리를 쓰지 못했고, 기운이 없었다. 트릭스터의 농간도 이보다는 덜 짓궂을 터였다. 마치 차려놓은 밥상처럼 베니는 침대위에 앉아있었다.

딘의 양 손이 거칠게 베니의 어깨를 잡아 내리눌렀다. 투박한 몸이 침대로 넘어지듯 누여지고, 모자는 벗겨져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베니는 딘을 공격할 수 없었다. 인간에게 뱀파이어의 이와 손톱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지금 제가 딘을 반쯤 찢어놓는다면 누가 그를 치료해줄 수 있겠는가. 베니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았다.

“이봐, 딘.”

어르듯 불렀다. 베니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조금은 불안함에 적셔져 있었다. 딘은 듣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달싹이는 베니의 마른 입술을 응시할 뿐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본능은 알고 있었다. 굳이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는 성별이 중요하지 않았다. 딘은 내리누른 베니의 몸 위에 올라탔다. 청바지 안에서 딘의 것은 이미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베니와 딘의 눈이 잠깐 마주쳤지만, 딘은 베니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반쯤 비어버린 듯 어지러웠다.

베니가 손을 뻗어 딘의 몸을 제 위에서 치워내려 할 때, 딘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Posted by 백은수

 

[슈퍼내추럴] 카스티엘 X 베니 라피테

 

 

 

녀석은 약쟁이였다. 녀석은 알콜 중독자였다. 녀석은 섹스 중독자이자 정신병을 앓고있었다. 온갖 문제투성이인 녀석이 윈체스터의 품에 떨어진 셈이었다. 카스티엘은 아침에 일어나면 딘이 마시다 만 맥주를 제가 해치우곤 했다. 김이 다 빠진 것을 마시면서도 녀석은 ‘좋은 맥주’라고 말하곤 했다. 멸망의 시대에는 먹을 게 드문 법이야. 카스티엘은 자신이 먹었던 말 오줌 맛이 나던 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즐겼다. 그것은 척이 직접 만든 거였어. 끔찍했지. 재미있는 안주거리를 씹듯 척의 이름을 곱씹으며 카스티엘은 딘을 응시했다. 말의 끝마다 붙어 나오는 실없는 웃음은 잔뜩 풀어져있었다. 그 본인의 표정과 마찬가지로. 그때마다 딘은 주로 침묵했고 샘은 한숨을 내쉬었다. 베니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베니에겐 망가진 카스티엘이 오히려 익숙했다. 비록 그가 알던 카스티엘은 술과 여자와 약에 취하지는 않았었지만. 베니는 딘처럼 카스티엘을 안쓰럽게 보지도 않았고, 샘처럼 꺼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가장 보통의 존재를 대하는 사람처럼 카스티엘을 대면했다. 약에 취한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술을 마시고 킬킬 댈 때 고개를 설레설레 젓지도 않았다. 그래서 인간인 카스티엘은, 베니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베니라는 이름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작은 곰 인형 같은 이름이잖아. 저 녀석은 다 큰 그리즐리베어인데 말이야. 베니의 듬직한 몸을 훑어보며 카스티엘은 생각했다.

베니는 카스티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저토록 망가진 녀석이라도 딘과 그 동생에게는 꼭 필요한구나.’ 같은.

카스티엘이 죽고 텅 빈 껍질만이 남았을 때, 베니는 딘의 부름을 받았다. 두 형제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넋을 반쯤 놓았고 분노할 의지조차 상실한 채였다. 베니가 개중에 가장 덤덤했다. 애초에 죽은 상태로 만난 인연이었으니, 카스티엘이 또 죽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연옥에서 2번이나 살아 돌아온 베니는, 갈팡질팡 하는 형제에게 제안했다. 카스티엘을 도로 살려내자고.

그것은 베니가 샘을 데리고 연옥에서 탈출한지 몇 달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샘을 홀로 지상으로 올려 보내려던 베니는, 샘의 완강한 고집에 그 의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샘은 도망치는 대신 베니와 함께 한 무리의 뱀파이어와 날붙이를 맞대고 싸웠다. 딘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했으니까 나는 데려갈 거야. 샘의 말에는 의지가 있었다. 연옥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나간다는 딘의 음성과 샘의 것이 겹쳐 들리던 순간이었다.

베니는 샘의 몸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울 것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로 억지로 웃던 딘은, 샘을 와락 끌어안고는 베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는 10분도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떠났다. 형제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물론, 그 관여라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그는 좋든 싫든 본래의 카스티엘을 되돌리는 팀의 한 주축을 맡고 있었다.

카스티엘이 죽은 것은 몇 주 전의 일이었다. 마치 머릿속에 칩이라도 박힌 것처럼 조종을 당하던 녀석은 언제나 그랬든 자유의지로 저항했고, 결국 그것은 천국의 상부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되고 말았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카스티엘이 동족에게 미움 받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던가. 샘과 딘은 제법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이라 그들의 천사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간간히 걸려오는 전화에서 카스티엘은 언제나 ‘괜찮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있었다. 사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벗겨낼 수 있는 얕은 거짓말이었지만 딘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딘에게 일 순위는 샘이었다.

카스티엘은 예고 없이 죽었다. 정말이지 허무하고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텅 빈 시신에는 영혼이 없었고 은은하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는 눈꺼풀에 감겨있었다. 베니는 공기 중에 떠돌던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카스티엘이 더 이상 살아있지 못한 존재임을 그의 후각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하지만, 형제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그리고 형제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문서를 뒤적이는 것은 형제가 오래 적부터 해 오던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선조들이 물려준 방대한 자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최후로 남은 지식의 사람들이었다. 수백 권, 아니, 수천 권에 달하는 자료 중에 죽은 천사를 되살리는 법이 하나쯤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매달렸다. 카스티엘의 시신은 태워지지 못했다. 그는 벙커 주변에 묻혔다. 언제든 되살릴 수 있도록.

아마 살아생전의 바비가 들었더라면 멍청한 일이라고 일갈을 했겠지만, 바비는 천국에 올라가고 없었다. 베니가 연옥에서 샘과 함께 기어 올라왔던 바로 그 날에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진짜’ 카스티엘을 불러내기 위해선 내가 필요하다는 말이잖아.”

 

샘의 설명을 중간까지 듣다말고 카스티엘이 말을 잘랐다. 관심 없다는 투였다. 마치 하등 상관없는 남의 일을 듣는 것처럼. 기실 남의 일이 맞기는 했다. 차원을 건너고서야 만날 수 있는 본인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 흙투성이 신발과 테이블이 부딪혀 턱, 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벙커는 조금 서늘하다 싶을 정도로 온도가 떨어져있었다. 샘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카스티엘의 발을 흘깃거렸지만 지적을 하지는 않았다. 딘은 입 꼬리를 아래로 내린 채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그런 셈이지. 작게 덧붙이면서.

딘과 샘, 베니와 카스티엘은 모두 벙커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바비의 폐차장에 마냥 머무를 수는 없었으니, 이것이 최선이었다. 비록 카스티엘에게 벙커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해도 말이다. 아포칼립스 시절의 카스티엘은 비밀엄수나 진지함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여, 샘은 항상 불안해했다. 카스티엘은 샘의 그 애매모호한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무너진 자에게 주변을 둘러보고 배려해 줄 여유란 적었다.

임팔라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벙커로 이동할 때, 카스티엘은 베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베니와 카스티엘의 눈동자는 햇빛에 투명하게 부셔지듯 반짝였다. 닮은 색이었다. 베니의 발치에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이 놓여있었다. 혈액 팩으로 가득한 것이라, 말하자면 베니의 도시락 통이었다. 카스티엘의 얼굴위로 햇볕의 장막이 드리울 때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한 인간이 그러하듯이. 베니는 카스티엘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그것이 음악소리 같다고, 베니는 생각했다.

죽을상을 하고 자꾸만 삶을 내려놓으려는 것보단 차라리 이쪽이 낫지. 베니는 그 말을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딘과 샘이 지금 불러낸 카스티엘을 명백하게 싫어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Posted by 백은수

 

쿠엔틴 x 베니 라피테

 

 

옥에서, 아들이라는 호칭은 사치라고 생각했지. 그 생각을 몇번이나 곱씹었는지 몰라.

목에서 가르랑거리는 웃음이 가래처럼 들끓었다. 베니의 물 빠진 파란 눈동자는 반쯤 내리감아진 눈꺼풀과 짧고 숱 많은 속눈썹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콧등까지 기어 내려온 참이었다. 짧게 자른 손톱 끝으로 원목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베니는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침묵을 애써 메우려는 듯이. 베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적막해진 것들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제법 왁자지껄했는데 말이지. 한숨처럼 길게 호흡을 몰아 내쉬며 베니는 피에 젖은 칼을 바닥에 내던졌다.

머리가 떨어진 시체 두 구가 뒹구는 방은 참혹했지만 연옥만큼은 아니었고, 끔찍했지만 베니 자신의 과거만큼은 아니었다.

베니는 자신의 손으로 목을 벤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의 시신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목과 머리가 완벽히 분리된 시체 말이다. 분수처럼 튄 피는 바닥에 스프레이처럼 흩뿌려져 카펫을 더럽혔고 절단면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피는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베니의 신발 코가 피에 젖었다. 베니는 발을 치우지 않고 그저 피의 흐름을 눈으로 좇았다. 진동하는 비린내는 식욕을 자극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어 그저 역겨울 따름이었다.

이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베니는 그러지 못했다. 발이 이 자리에 박혀 그대로 망부석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뒷목을 싸하게 적시는 복수심과 증오가 한바탕 휩쓸고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폐허가 된 감정의 잔재뿐이었다. 허탈함과 허망함, 씁쓸함이 한군데 뒤섞여 까만 타르처럼 끈적이며 그의 뇌를 뒤덮고 있었다. 끝을 보면 기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왼손으로 제 목을 매만지며 베니는 얕게 인상을 찌푸렸다. 쿠엔틴의 손으로 직접 베어졌던 목은 이제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새로이 빚어낸 몸인 것 마냥.

너는 나의 가장 사랑받는 자식이다.

원치 않는 봉사를 요구하는 그에게 복종한 다음날이면, 베니의 창조주는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속삭이곤 했다. 나의 아들, 베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창조물. 목소리는 달콤했고 사랑이 충만했다. 당시의 쿠엔틴의 말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음을 베니는 알았다. 베니는 쿠엔틴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누구보다 영리했고 진실 됐으며 순종적이었으니. 베니는 아버지를 거역할 줄 모르는 자였다. 잠자리에 처음 불려간 날도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인형마냥 베니는 그의 아버지 앞에선 자아라는 것이 사라지곤 했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쿠엔틴이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은 때 그는 그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문채로 아이보리색 티셔츠의 뒷목을 잡아 단숨에 벗었다. 반항하지 못하리란 건 스스로도 깨닫고 있는 부분이었다. 의미 없는 반항은 화를 자초할 뿐이라는 것 베니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쿠엔틴에게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불쾌한 기색이 빤히 서린 눈으로 저를 보면서도 불평한마디가 없는 베니가 우스워 쿠엔틴은 종종 예고 없는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기어이 신발을 적셔나가기 시작하는 피를 보며 베니는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는 웃음소리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죽어서도 당신은 나를 괴롭히는군. 원망이 눌러 담긴 혼잣말이었다.

이승에 돌아온 이후에 하루도 그의 꿈을 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일 밤 그는 쿠엔틴에게 입을 맞췄고, 교태 없이 옷을 벗었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가 사람이었더라면 식은땀에 절어 깼을 게 분명한 악몽이었다. 잠들지 못한 연옥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쿠엔틴의 잔상은 선명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뱀파이어가 된 이후 그의 우주는 쿠엔틴이었으니. 안드레아가 끼어든 후에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해야 옳을지도 몰랐다.

그가 쿠엔틴에게 반항을 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불같은 연정 덕분이기도 했다. 미친 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는 강직하게 쿠엔틴에게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뱉었다. 그것은 일말의 기대에서 비롯된 어긋난 선택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사랑받는다는 기대. 쿠엔틴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가 자신일 거라는 오판. 베니는 자신이 정말로 쿠엔틴의 아들이라고 착각했다. 쿠엔틴이 매일 밤 달콤하게 속삭이던 말이 그것이었으니. 그저 부질없는 기만인줄도 모르고.

깊게 숨을 들이쉬면 생생한 날것의 비린내가 폐부를 깊게 찌르고 들어왔다. 귀를 기울여도 인기척은 저의 것 밖에 없었다. 아래층의 딘은 잠잠했다. 숨어있거나, 아니면 모두를 처리했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연옥에서 저와 같이 일 년을 보낸 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런 뱀파이어 소굴에서 죽을 놈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었지.”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너의 인형이었다, 쿠엔틴.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세워, 단단한 손톱 끝으로 쿠엔틴이 아끼고 마지않던 책상에 길게 상흔을 남기며 베니가 속삭였다. 들어줄 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잠한 울분을 느리게 쏟아냈다. 마음속에서 응축되고 엉킨 것들은 걸쭉한 피가래처럼 천천히 흘러나왔다. 뱉어내는 것조차 고통이라 베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죽어버린 그의 우주가 슬픈 것은, 그저 창조물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이길 바라면서.

그는 아들이 아니었다. 그저 하찮은 인형에 불과했다. 얼마든지 새로운 대체품을 구할 수 있는 인형.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만약 베니가 정말로 쿠엔틴의 아들이었더라면 그는 베니를 죽이지 말았어야했다. 모든 것의 색이 빠져나가고 혼돈과 날 서고 굶주린 본능만 가득한 곳에 베니를 떨어트리면 안됐다. 쿠엔틴은 가차 없이 베니의 목을 베었고 베니는 그렇게 연옥에 떨어졌다. 썩은 오물냄새와 피비린내만 진동하는 그곳에서 그는 백년을 넘게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다는 말은 모순이었다. 죽어버린 몸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기백 년 동안 죽음을 연장시켜왔다.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그가 원하던 통쾌함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힘 빠진 어깨위로 내려앉는 감정의 무게가 상당해서 베니는 무릎을 꿇고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자리에 그렇게 몸을 말고 도로 숨이 멎고 싶은 충동이 그를 뒤흔들었다. 아버지. 쿠엔틴. ……나의 창조주여. 달싹이는 입에서 맴도는 말이 도무지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폐가 찌그러져버린 것처럼 숨이 막혀서 그는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에겐 이곳이 연옥이자 지옥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견디기 힘들 리가 없었다.

대장. 당장 네가 이곳에 뛰어들어서 이 적막을 깨트려줬으면 좋겠어. 무너진 우주의 파편을 밟고 서서 베니는 생각했다. 등을 맞대고 싸우던 전우를. 아래로 한없이 침강하는 와중에 잡을 손길은 그뿐인데, 그것을 잡을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베니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딘과 쿠엔틴은 달랐다. 딘이 자신의 육신을 도로 돌려놓은 것을 재창조의 범위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딘과의 거리는 확실했고 좁혀지지 않았다. 좁힐 수 없는 간극이란 것은 항상 존재했다.

결국 움켜쥔 베니의 손에 남은 것은 수많은 자들의 피와 자신의 회환뿐이었다. 주인이 없어진 인형은 오갈 데 없이 그저 망가져 굴러다니는 게 전부였다. 쿠엔틴의 목을 벤 그 시점부터 베니는 자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스러진 우주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왈칵 쏟아지는 설움을 베니는 억지로 삼켜냈다. 오랜 세월 별러오던 복수가 결국 제 심장에 칼을 꽂는 것과 같은 행위였음을, 그는 인정할 수는 없었다.

까만 밤이 내려앉은 저택은 아까의 소란을 모른 척 하듯 유달리 잠잠했다. 외벽 바깥에서 휘몰아치는 바닷바람 소리를 베니는 들을 수 있었다. 흡혈귀의 감각은 예민했고 고요는 무거웠다.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저의 죽은 아비를 응시했다. 그림자 진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터였다. 비밀에 묻히게 될 베니 라피테의 속내는, 그 본인조차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치욕에 가까웠다. 의식에 기저로 왈칵 쏟아지는 것들을 억지로 쑤셔 넣으며 베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어떤 이름보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어울리던 사내의 시신을 오래도록 눈에 담으면서.

나는 그대의 인형이었다, 쿠엔틴. 장난거리에 불과했지. 하지만 나의…….

조촐한 추도사의 뒤가 그대로 잦아들었다. 베니는 끝끝내 인정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떻게 망가져가고 있는지 순간순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그는 온 몸을 강타하는 강렬한 감정 하나를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고 호흡을 정돈한 그는 마침내 담담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중간에 잘라낸 것들은 결국 그의 마음에서 맴돌다 썩어 가리라.

……나는 진심이었다. 영감님.

보트 한 척이 해안가에 대어져있는 섬. 외딴 별장의 이층에서, 한 남자의 세계가 그렇게 스러졌다.

Posted by 백은수

 

 

 

 

[슈퍼내추럴] 카스티엘 X 베니 라피테

 

 

 

 

“우린 미래의 너를 살리기 위해 너를 불렀어.”

 

반쯤 약에 절어있는 카스티엘에게 딘이 말했다. 샘은 팔짱을 끼고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있었다. 어둑한 창 밖에서 쏟아지는 유일한 광원인 달을 등지고 앉은 사내는 챙이 작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에 카스티엘은 으흥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뭐야? 말꼬리가 뒤로 길게 늘어지는 것은 흔한 약쟁이의 것과 같아서 샘은 얕게 인상을 찌푸리며 딘을 응시했다. 딘은 말이 없었다. 아포칼립스 시절의 카스티엘을 만나본 것은 딘이 유일했다. 딘은 카스티엘의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과거에서 그들이 끌어올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한계였다. 과거의 ‘천사’ 카스티엘은 그들이 현재로 불러오기에 너무나 거대하고 강한 존재였다.

휘청휘청하던 카스티엘이 풀썩 자리에 쓰러졌다. 쿠션이 내려앉은 소파에 주저앉아있던 사내는 말이 없었다. 그늘진 얼굴은 이목구비조차 불분명해서, 카스티엘은 그가 자신과 구면인지 아닌지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물론 밝은 곳에 있었다고 해도 약에 취한 그가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겠지만.

 

“그러니까……. 이 캐스에게 은총만 넣어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샘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한 가득이었다. 믿기 힘들다는 듯 그는 몇 번이고 카스티엘을 위 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카스티엘은 그저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아, 한창 좋을 때 이런 곳으로 불러내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니면 이것도 환각인가? 샘이 있는걸 보니 말이야. 꼬인 발음은 불분명했다.

 

“이거 연옥에서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걸.”

 

침묵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는 쇳소리가 반쯤 섞여있었고 발음의 후미는 버릇인 듯 뭉텅뭉텅 잘려나가고 없었다. 딘은 어깨를 으쓱하며 사내를 응시했다.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카스티엘은 딘의 시선에 차분히 내려앉은 동료애를 읽었다. 이만큼 무너진 자신에게도 딘이 건네주던 그 시선 말이다. 저 사람, 많은 신뢰를 받고 있군. 이제 상체까지 바닥에 눕히다시피 하며 카스티엘이 생각했다.

그는 한창 약에 취한 채 저만의 시간을 즐기던 중이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눈앞이 즐거웠고 잠시간 내려놓는 시름이 편안했다. 그러다가 눈앞에서 블랙홀이 소용돌이 쳤고, 그는 빨려들었다. 카스티엘은 이제 환각이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광경이 십 수 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을 때 까지 말이다. 이것은 약에 의한 환각이 아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된지 몰라도,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의 윈체스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루시퍼가 들지 않은 샘과 딱딱하지 않은 딘 말이다. 그리고 이름을 모를 녀석 하나. 카스티엘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윈체스터’라는 이름아래에 너무나 쉽사리 이해가 되고 있어서. 미래의 형제 녀석들, 또 무슨 일을 벌인 거야? 풀린 웃음으로 셋을 찬찬히 둘러보며 카스티엘은 질문을 속으로 곱씹었다. 가운데 소파에 앉은 사내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다. 딘과 샘은 시선을 교환하고 한두 마디 저에 대한 논의를 했지만 사내는 그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 앉아 카스티엘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저 녀석을 찬물에 담그는 게 어때, 대장님.”

“어?”

“심박 수가 빨라. 천사, 아니, 전(前) 전사의 심장소리가 내 식욕을 자극하는데.”

 

샘이 인상을 구기며 사내를 흘겼다. 진심이 담긴 질타는 아니었다. 사내의 말 역시 농담에 가까웠으니. 그는 그저 약에 취한 카스티엘을 먼저 깨우자는 소리를 돌려한 것뿐이었다. 딘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캐스, 일단 씻고 얘기하자. 반쯤 남은 병맥주를 테이블에 올려두며 딘이 몸을 일으켰다. 카스티엘은 늘 그렇듯 딘의 말에 반사적으로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힘이 풀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려다 미끄러졌고 고개를 거의 바닥에 쑤셔 박을 뻔했다. 샘의 한숨이 유독 깊고 묵직했다.

카스티엘을 일으키는 데는 두 명의 힘이 필요했다. 늘어진 성인 남자를 쉽게 일으키는 것은 딘에게도 무리였다. 샘이 와 카스티엘의 왼팔을 잡아 부축할 때까지도 남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시선만이 카스티엘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카스티엘의 시선 역시 남자에게 붙박인 듯 머물렀다. 어둠속에서 시선이 교환될 때 둘 사이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다만 카스티엘이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렸을 뿐이다. 딘에게 몸의 반을, 샘에게 나머지 반을 기댄 채로 말이다. 남자가 가볍게 숨을 들이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쏟아지는 달빛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남자의 그림자 머리가 카스티엘에게 닿았다. 여전히 얼굴은 그늘에 불분명하게 가려지고 있었다.

 

“아, 그리고 말이야.”

 

반 강제로 옮겨지던 카스티엘의 뒤통수에 남자가 화제를 전환하듯 말을 던졌다. 전환할 화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티엘은 ‘으응?’하고 그에게 하는 건지 그저 혼자 내는 콧소리인지 모를 작은 반응을 보였다.

 

“내 이름은 베니야. 베니 라피테.”

 

그것이 과거에서 날아온 인간 카스티엘과 연옥에서 기어 올라온 딘의 뱀파이어 동료가 처음 만나던 순간이자, ‘죽어버린 카스티엘 되살리기’ 작전의 첫 날이었다.

 

 

 

 

Posted by 백은수

 

 

[슈퍼내추럴] 딘 윈체스터 X 베니 라피테

 

 

 

 

베니는 우뚝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바탕의 소란 탓에 알지 못했던 비를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것들은 베니의 머리를 적시고 어깨를 적시고 바닥으로 하강했다.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의 별장, 그리고 그 우측으로 해변을 따라 걷다보면 나오는 배 한 척, 럭키 마이라.

 

그래, 이곳은 쿠엔틴의 본거지였다. 베니는 현관에 서서 비를 맞고 그대로 돌아갈 것인지 잠시 소나기가 그치길 기다릴지 고민했다. 등 뒤에서 딘이 부스럭대며 곡도(曲刀)에 묻은 피를 시신의 옷에 닦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칼을 시미터라고 하던가. 시답잖은 생각이 베니의 머릿속에서 부유했다. 피가 튄 신발 코에 바닥에서 되튄 빗방울이 안착했다. 베니의 시선은 럭키 마이라에서 아득한 해변으로 멀어지다 해변, 별장 앞의 조명, 그리고 현관의 계단과 발치로 가깝게 다가왔다. 시선은 갈 곳을 몰라 방황했다. 마치 베니 그 자신처럼.

 

 

“출발 안 해?”

 

“비가 오는데.”

 

 

오른쪽 뒤에서 불쑥 날아든 저음의 목소리에 베니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이 녀석은 방금 전 제 옛 사랑의 목을 베었다. 화를 내야하는 부분일까. 아니면 감사해야하는 부분일까. 베니는 혼란스러움에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목이 메어서 말이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딘이 끊어준 것은 과거의 족쇄였지만, 베니는 이 족쇄하나에 묶여 지상으로 올라온 자였다. 갈 곳 잃은 영혼은 방황하기 마련이었다. 목적지를 잃은 그는 그저 소나기를 응시했다. 아니, 소나기 너머의 흐릿하고 어둑한 풍광을 눈에 담았다. 어느 쪽을 봤든 머릿속에 남는 것은 없었지만.

 

 

“소나기인 것 같은데. 잠시 기다렸다 갈까.”

 

 

베니의 옆에 나란히 선 딘이 손을 내밀어 후드득 떨어지는 빗물을 받았다. 차가운 물기가 금세 딘의 손을 적시고 옷소매를 물들였다. 베니는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고 입 꼬리를 아래로 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될 것 없다는 그 나름의 신호였다.

 

딘에게서는 비린내가 났다. 비가 오고 있으니, 코끝에 물비린내가 스며서 그러는군. 베니는 생각했지만, 이것이 딘을 위한 어처구니없는 변명임은 스스로도 잘 알았다. 이것은 안드레아의 피비린내였다. 베니의 후각은 인간일 적보다 수십 배는 예민했다. 물비린내와 피비린내를 구별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세뇌하듯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소나기가 퍼부으니, 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군.

 

베니는 딘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딘이 마땅한 일을 했다는 사실은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상황에 딘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안드레아의 손에 의해 연옥에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아마 연옥에서는 저의 아버지 쿠엔틴과 소렌토가 기다리고 있었을 테고. 여러모로 좋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베니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여러 가지 질문들은 부유했지만 정확한 문장이 아닌 터라 그는 대체 자신의 속을 뒤집어놓는 물음표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딘은 베니의 등을 보고 있었다. 오늘의 베니는 제가 알던 녀석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베니의 어깨가 쳐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딘은 살금살금 목이 떨어진 안드레아의 시체를 끌어 복도로 옮겼다. 소나기가 지나갈 때 까지만 머무를 것이라고 해도, 베니의 눈앞에 동족의 시체를 늘어 놓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특히나 그것이 베니의 전 반려였을 경우에는 말이다. 다리를 잡아끌자 안드레아의 몸뚱이는 만세를 하듯 양 팔을 위로 늘어트리며 질질 끌려왔다. 떨어진 머리는 의자 다리 옆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큼지막한 눈을 부릅뜬 채로.

 

입이 마르는 기분에 딘은 마른침을 삼켰다. 뱀파이어 둥지를 친 것은 수십 번이었지만, 오늘처럼 기분이 착잡한 적은 없었다. 비가 모든 감정을 땅으로 잡아끌어 내리는 것처럼 자꾸만 마음이 쳐졌다. 혀끝에서는 쓴맛이 돌았고 머리에선 약한 두통이 올라왔다. 딘의 시선은 여전히 베니에게 붙어있었다. 안드레아를 치워내면서도.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 볼까 생각했지만 딘은 이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베니의 심정은 제가 짐작할 수 없는 범위였다. 산전수전을 겪고 주변 사람들을 수 만 번 잃어본 그였지만, 이런 상황을 겪은 적은 없었다. 제가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제 옛사랑을 베어버린 상황 말이다. 딘은 자신이 베니에게 유일하게 남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베니는 생각보다 오래 살았고, 적이 많았고, 동료가 적었다. 게다가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은 지금……. 이 집에서 죽어나지 않았는가. 이제 베니에게 오롯이 남은 것은 저였다.

 

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딘은 그 소리와 감촉을 애써 무시했다. 보나마나 샘의 연락임이 분명했고, 그는 받고 싶지 않았다. 베니와 단 둘이 보낼 시간은 소나기가 잠시 내리는 지금 뿐이었다. 아마 오늘 이후로 샘의 간섭은 심해질게 분명했고 자신은 동생을 끊어내지 못할 테니. 딘은 어렴풋이 베니와 저의 마지막을 짐작했다. 헌터와 뱀파이어.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은 분명했다. 이 조합이 제법 괜찮다고 주장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샘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샘은 이해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니,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않을 터였다. 마치 과거의 자신이 샘의 괴물 친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봐, 베니. 나는…….”

 

“알아.”

 

“안다고?”

 

 

베니의 바짓단이 젖어가고 있었다. 베니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란 조명이 아슬아슬하게 베니의 머리칼에 스쳐 반짝반짝 부셔졌다. 베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의 옆선이 간신히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돌린 그는, 뒤편의 딘을 흘깃 응시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딘. ……덕분에 살았다. 목소리는 무거웠다. 소나기가 목소리에까지 스며들어있었다.

 

베니의 옷소매에는 피가 튀어있었다. 그가 그 자신의 아비를 베면서 튄 피였다. 그는 사랑받는 아들이자 으뜸가는 피조물이었다. 베니는 제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았다. 비뚤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확실한 애정이었다. ‘신과 동침하는 특권’이라는 말은 안드레아에게만 해당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역시 그 특권을 누렸으니까. 베니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코웃음 쳤다. 결국 추잡하게 얽힌 관계들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제 은인이자 친구인 녀석의 칼 아래에서.

 

베니는 그럼에도 딘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안드레아를 베어버린 녀석이지만,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분노하지 못했다. 딘은 베니에게 중요했다. 그 중요라는 것이 어떠한 감정을 담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지만. 딘은 중요한 존재였다. 다시 말하면 소중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베니는 딘을 믿었고, 아꼈으며, 소중히 여겼다.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나는…….”

 

 

애써 입을 열었지만 뒷말은 서서히 흐려지다 입안으로 말려들어갔다. 베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깥을 향해 열린 문을 등지고 돌아보기 싫은 실내로 몸의 전면을 향하자 보이는 것은 의자에 걸터앉아 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딘이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억지로 앉혀져있던 자리였다. 딘이 몸을 뒤척이면 의자 가죽이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제 나는 너 밖에 안 남았다. 디노. 농담처럼 던지려고 했던 말인데, 베니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딘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가 어떠한 족쇄가 될지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베니는 딘에게 이 이상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작은 도움을 청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무게는, 저로서도 사양이었다. 마치 제 남은 인생을 책임지라는 소리 같지 않은가. 딘은 친구이기 이전에 헌터였다. 이 순서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베니는 생각했다.

 

딘에게는 천사가 붙어있었다. 천사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헌터? 그게 과연 얼마나 될까. 딘은 그저 그런 사냥꾼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폭풍의 눈에 기거하는 생명체일 게 분명했다. 그런 존재들은 대개 짊어진 것이 어마어마하기 마련이었고, 베니는 그 위에 자신까지 하나의 짐짝으로 얹히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인사나 던질 수 있는 친구에서 만족해야했다. 비록 자신에게 남은 것이 딘뿐이라고 해도.

 

소나기 소리가 한층 거세어졌다. 딘은 베니의 푸른 눈을 보고 있었다. 음영이 져서, 눈동자는 베니의 등 너머로 펼쳐진 어둑한 바다 같았다. 반사되는 빛은 적었고 심연이 얼핏 드러나는 묵직함이었다.

 

딘은 끈기 있게 베니의 말이 제대로 끝맺어지길 바랐으나 베니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딘이 들은 것은 ‘이제 나는…….’이라는 불문명한 문장의 초두뿐이었다. 뒤에 이어질 말은 셀 수없이 많아서 딘이 예측할 수가 없었다.

 

딘은 제 안의 상반된 두 감정 중 어느 것에 치우쳐야 할지 몰라 얕게 인상을 쓰고 표정을 가다듬고 있었다. 상실감에 젖은 베니는 딘에게 마이너스였다. 반대로, 그러니까 플러스적 요소는……. 딘은 어둑한 복도 끝으로 끌어내어진 안드레아의 시체로 시선을 던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했다. 그는, 그러니까 딘 윈체스터의 가장 심연의 본능은 어처구니없게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웃음 말이다. 살생을 했다는 것보다 저의 감정이 이렇게 널뛰고 있다는 사실에 딘은 더욱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마음 한 조각은 베니의 상실을 기뻐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저 뿐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에. 베니에게 유일무이한 누군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딘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무언가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는 들뜸은 찝찝하고 불쾌했다. 떨쳐지지도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베니를 보며 딘은 표정을 다잡았다. 빗발치는 소나기를 따라 두통역시 거세졌다. 상반된 감정과 이성과 본능이 한데 어우러져 저들끼리 엎치락뒤치락 대는 곳이 딘의 머릿속이니, 두통이 일어날만했다.

 

둘은 서로를 가만 들여다보며 침묵했다. 침묵은 길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각각 정리해내야 할 번잡한 상념들이 많아 서먹한 기류를 느낄 새가 없었다. 여전히 비린내는 진동했고, 베니는 그것이 물비린내라고 되뇌었다. 따듯한 조명이 비추는 바닥은 질질 끌린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딘과 베니의 옷은 모두 핏방울이 군데군데 튀어있었다. 목 단추를 하나도 잠그지 않은 베니의 아이보리색 티셔츠는 다시 입지 못할 정도로 붉은 그림이 가득했다. 붉은 물이 든 소나기를 맞은 것 같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옷을 입은 딘의 상태가 그나마 나았다.

 

야차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저택에서. 초록색 눈에서 불꽃이 튀었고, 푸른 눈이 소나기에 젖었다. 결국에 마주하면 불은 꺼지고 물은 증발해버릴 관계라 그들은 다가서지 못했다. 연옥에서부터 지상까지 기어 올라온 둘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위태로운 관계는 들춰내지 못한 감정들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은 그저 추적추적 내리는 소나기에 모든 것을 씻어내기로 결심했다. 비가 그친 후 보트를 타고 육지로 나아갈 때면 평소의 자신이 되어있기로 마음먹으면서.

Posted by 백은수

 

 

SPN 기반 자캐 (Vampire Ver.)

라미엘 x 제임스 토드

 

 

 

 

기야, 안녕.

 

그 가벼운 인사말이 얼마나 묵직하고 어두웠는지, 토드를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했다. 주인이 없는 뱀파이어의 둥지 한 가운데서 벌어진 일이었다.

 

제임스 토드는,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제임스 토드는 꽤나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경찰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정신병이 있는 범죄자일 뿐이었지만. 헌팅을 위해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감옥에 들어가고, 신분을 위조하는 것은 그의 일상이었다. 재수가 없으면 그런 사실의 파편이 밝혀지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그는 경찰서에 들어가 차가운 수갑을 차고선 취조를 받아야만 했다. 물론 대개의 경우 다른 동료들이 와서 빼내주곤 했지만.

 

헌터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나빴지만 체감 상으로는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카드 위조나 신분 위조 덕분에 배를 곯지 않고도 생활 할 수 있었고, 프리랜서마냥 저 내킬 대로 일에 착수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일을 시작하고 나면 커피와 수만 가지 자료, 피와 사체들의 천국이 벌어지긴 했지만.

 

홀로 있는 뱀파이어의 둥지에서 토드는 저의 과거를 상상하던 중이었다. 불청객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간이었을 적의 그는 동족잔상의 비극을 자행하던 인물이었다. 늑대인간, 형태 변환자, 귀신이나 뱀파이어뿐만이 아니라 그는 사람을 죽였다. 죄 있는 자들을 마치 지옥의 수문장이라도 되는 냥 처참히 베곤 했다. 그는 악행을 행한 자는 죽어야 한다고 배웠기에, 그리 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토드는 감정이 있는 일개 인간에 불과했고 매 살인마다 덧씌워지는 죄책감은 검은 파도처럼 그를 잠식했기에 어느 순간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미래가 암담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그 죄의 무게를 견딜 수가 있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사람과 같은 것들을 죽였으니 나는 죽어서 지옥에 갈 거야. 제임스 토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천사 하나가 그의 일상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미엘. 사랑의 천사. 토드는 저를 보며 빙긋 웃는 사내를 향해 작게 이름을 읊조렸다. 라미엘, 이라고.

 

그가 이 종족과의 연합을 위해 로드하우스로 갔던 것은 수년전의 일이었다. 유황냄새가 진동했고 간간히 탄약 냄새가 있었으며 푸른 눈을 번쩍이는 존재들이 걸어 다니던 곳이었다. 그들은 팀을 짜 조사를 하고 사냥을 했다. 아니, 했었다. 과거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보통의 것들보다도 더욱 아득한 먼 일처럼 느껴졌다. 뱀파이어가 되고 난 이후에는, 인간이었을 적 이야기가 모두 꿈같이 느껴져서 더욱 그럴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천사를 하나 만났다. 다른 천사들보다 기억에 남는 이유는……. 글쎄. 그 녀석이 자신에게 버거울 정도의 관심을 주었기 때문일까. 끌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천사는, 날개달린 신의 전령들은, 그에게 다가오면 좋지 못했다. 제임스 토드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은 평범한 인간보다도 더 바닥이었다. 바닥이라기 보단 수렁에 가까웠다. 겁이 없는 천사가 멋모르고 다가온다면 쳐내는 것은 자신이어야 옳았다. 그래서 그는 천사를 버렸다.

 

지옥에 간 너를 도로 천국으로 끌고 올라갈 거야. 라미엘이 말했었고 거기엔 티끌만큼의 농담도 없어서 토드는 겁에 질렸다. 정말로 그렇게 될까봐. 살아있는 걸들을 죽음으로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인도한 자신이 양심 없이 천국에 발을 들이게 될까봐 토드는 겁먹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변했다. 송곳니를 가진 구슬프고 비루한 존재로 말이다.

 

자신이 죽인 뱀파이어의 피를 핥아먹으며 제임스 토드는 구역질을 했다. 피는 비리고 역겨웠지만 그보다는 이 행위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이 더욱 지배적이었다. 그는 피를 핥고 또 핥았다. 두 번은 못할 일이었으니 한 번에 완벽하게 해내야했으니까. 뱀파이어는 자신에게 피를 준 ‘아버지’에게 구속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는 저의 아버지가 될 자를 우선적으로 죽이고 일을 시작했다. 이 역시 용서받지 못할 살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오래된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트렁크 한 가득 혈액 팩을 쟁여두고, 그는 거기에서 변했다. 인적이 드문 산길이라 사람이 드나들 일은 없었다. 토드는 자신이 본능에 의한 살생을 하지 않길 바랐다. 어차피 연옥에 떨어질 몸이었지만, 그래도 죄를 늘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너는…….”

 

 

토드가 새액, 소리를 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천적을 만나 경계를 하는 뱀처럼 말이다. 맞은편의 천사는 그저 빙긋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웃음이 불안해서 토드는 안절부절 못했다. 자신을 죽이러 와준 거라면 기꺼이 목을 내어줄텐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뱀파이어가 되어 그의 품에서 멀어진 자신을, 라미엘은 전혀 꺼리고 있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아닌데.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하나의 자욱한 안개처럼 시야를 가리고 이성을 잡아먹었다.

 

라미엘이 한 걸음, 그에게 다가왔다. 발걸음은 조용하고 다가선 거리는 그저 한 발짝일 뿐이었지만 그게 숨이 막혀 토드는 헐떡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본능이 보내는 빨간 사이렌 소리는 극성맞을 정도로 요란한 경고였다. 라미엘은 손등으로 가볍게 제 입가를 문질렀고, 토드는 그의 옷소매에 낭자한 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결코 남의 피를 묻힐 자가 아니었는데. 그제야 토드의 시선은 천천히 사내의 복장으로 흘렀다. 멀쩡한 옷에 잭슨 폴록이 붉은 물감으로 예술을 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 지옥에 몸을 담그고 온 천사가 저러할까. 토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 자꾸만 목 너머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푸른 눈을 빛내는 녀석을 엇갈려 응시했다.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빛나는 것은 광채가 도는 푸른색인데, 머리가 인지하는 빛은 지독한 어둠이라서.

 

너는……. 대체 누구야?

 

토드는 질문을 꾹 눌러 삼켰다.

Posted by 백은수

 

 

 

   SPN 기반 자캐 (Demon Ver. )

주드 x 제임스 토드

 

 

 

 

흔들리는 시야에 잡히는 건 얼룩진 바닥과 까만 제 손등, 그리고 먼발치에 떨어져있는 칼 한 자루였다.

 

양 손으로 냉기 가득한 바닥을 짚고 개처럼 엎드린 채 사내를 받아내고 있던 제임스 토드는 문득 시야의 끄트머리에 걸린 칼에 정신을 빼앗겼으나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돌렸다. 깊게 박혀 들어오는 페니스에 몸이 자꾸만 흔들렸다. 기운이 빠져 팔이 꺾이고 상체가 무너질 것 같았지만, 토드는 이를 악무며 자세를 유지했다. 한순간의 함락이 불러일으킬 결과는 늘 참혹했으니.

 

이미 왼쪽 허벅지에는 칼이 깊게 박혀있었다. 아니, 박힌 게 아니라 다리를 관통한 상태였다. 상처에서 나온 피는 다리를 적시고 옷을 물들였으나 토드의 무너짐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개였고, 하인이었고, 장난감이었다. 제 뒤를 범하는 주드가 원치 않는다면 스스로의 안위조차도 보살필 수 없는 존재 말이다. 혀를 빼물고 밭은 숨을 헉헉대면서 토드는 제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성기를 적나라하게 느꼈다. 다리가 욱신거리고 뒤가 화끈거렸지만 그는 허리를 박자 맞춰 흔드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 토드는 과거의 저를 상상했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의 일인가. 지옥의 시간은 지상과는 전혀 달라서 그 흐름을 토드는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죽어서 지옥에 끌려온 자신은, 고문대에 눕혀져 수많은 세월을 주드와 함께 보냈다. 다른 누구도 없이, 둘 만이서 말이다.

 

주드는 토드를 부러트렸고, 살을 발라냈으며, 더러는 몸을 범하기도 했고, 눈을 적출하거나 이빨을 뽑아내기도 했다. 순간순간의 고통은 첨예했고 생생했다. 처음 사십년, 아니, 육십년? 기억나지 않는 수십 년의 세월동안 토드는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이것은 내가 죽인 수많은 자들의 목숨 값이다. 이것이 나의 죗값이고 나는 고문대에서 내려올 자격이 없다. 그는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인간이었으나, 자신의 평안을 위해 지옥으로 기어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주드는 그런 제임스를 어린아이마냥 가지고 놀았다. 언젠가는 이 유약한 헌터가 굴복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그는 차근차근 복종심을 세뇌시키고, 두려움을 주입했으며, 먹이사슬을 깨우치게 만들었다. 손가락을 부러트리면서, 배를 갈라 드러낸 내장을 스스로가 볼 수 있게 잡아 꺼내면서, 뽑아낸 본인의 안구를 씹어 삼키게 만들면서.

 

토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칼을 잡았다. 비명을 내지르던 목이 쉬고 닳아 목소리가 깨진 후였다. 목소리는 깨졌고 온 몸은 피 범벅이었으며, 입고 있던 옷은 넝마가 되어 제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주드는 매번 그러했든 조금은 나른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날이 무딘 칼로 처음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잠이 없는 악마는 새벽처럼 토드를 찾아와 늦은 밤까지 하루를 즐겼다. 종종 그잘 벼려진 칼은 살갗을 가볍게 쨌지만, 주드는 항상 날이 닳아버린 것들을 사용했다. 살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찢어내야만 상처를 낼 수 있는 칼 말이다.

 

토드는 헐떡이며 구멍 난 목에서 색색대는 소리를 내곤 칼을 잡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굴복했다. 고문대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것만으로도 천국에 당도한 것 같아 토드는 감격에 겨워했다. 그렇게 그는 악마가 되었다. 악마이자, 악마의 개가.

 

우열 관계는 생각보다도 더 뿌리 깊게 박혔다. 단순한 굴복정도가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것이다. 주드와 자신의 상하 관계가.

 

주드의 신음소리가 불만족스러웠다. 표정을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토드는 그런 것 같다고 느꼈다. 팔이 벌벌 떨렸고 칼에 찔린 다리는 화끈거림에도 불구하고 토드는 자신의 그 모든 상태보다 주드의 작은 신음소리에 집중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 토드의 머릿속에는 그뿐이었다. 그는 허리를 바짝 치켜세웠고 내벽을 힘줘 조였다. 제 안을 들락거리는 페니스가 스팟을 찌르고 내벽을 자극하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행위 자체에 흥분해 끙끙대는 자신 역시 차후의 문제였다. 악마가 된 토드의 세계는 주드를 지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의 일 순위는 주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치닫는 사정 감을 애써 참으며 토드는 주드가 한시라도 빨리 만족하며 제 안에 파정하길 바랐다.

 

이제 다리를 벌리는 것은 익숙했다. 수치심은 여전했고 스스로에 대한 경멸역시 끊이지 않았지만 토드는 주드의 눈짓 한번이면 매번 옷을 벗고 다리를 벌렸다. 그러길 바라는 발정난 개처럼. 필요하다면 엉덩이를 흔들고 신음소리를 높였다. 그는 잘 교육된 개였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시간동안 주드에 의해 찢겨져나간 그는 살아생전의 본인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더 겁이 많았고, 더욱 처절했다.

 

주드가 토드의 둔부를 내리칠 때, 그는 전율하며 신음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주드에게만 발정했다. 이 역시 수십 년 동안 반복된 일상의 폐해였다. 눈치를 보는 스스로가 한심해 미치겠는데도 자신의 안을 헤집는 주드의 것이 좋아서 토드는 죽을 것만 같았다. 이미 죽은 몸이었지만. 아, 아아. 아. 입에서 나오는 탄성을 막을 수가 없어 그는 혀를 내밀고 헐떡였다.

Posted by 백은수

 

 

[슈퍼내추럴] 크라울리 X 베니 라피테

 

 

 

 

크라울리가 지옥에 괴물 하나를 들인 것은 정말이지 의외의 결정이라, 지옥 내에서도 그의 심중을 예측하려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왕이 미쳤다는 극단적인 말부터, 분명히 또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실거라는 긍정적인 말까지. 돌아다니는 말은 많았으나 크라울리 앞에서 이렇다하고 간언하는 자는 없었다. 그는 지옥의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비 없는 폭군이었다. 특히나 법정에서는 말이다.

 

크라울리의 명령으로 연옥에 들어간 마녀와 마법사들은 뱀파이어 하나를 억지로 몸에 넣고 들어왔다. 그의 육신은 크라울리가 지상에 들러 손수 찾아왔는데, 지옥의 그 누구도 크라울리가 이토록 정성을 들이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여전히 소문은 파다했고 억측은 난무했지만 크라울리에게 직접 물어보는 자가 없어 아무도 진상을 파악하지 못했다.

 

연옥에서 끌고 온 녀석은 지하 감옥의 벽에 붙은 족쇄에 메여있었다. 그를 찾을 수 있는 것도, 말을 붙일 수 있는 것도 오로지 크라울리 뿐이라 그 녀석의 이름을 아는 악마는 아무도 없었다.

 

 

“내 말을 좀 들어봐.”

 

 

날이 무딘 나이프를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크라울리는 감옥 안을 서성였다. 벽에 기대 널브러지듯 앉은 사내는 손을 봉쇄한 수갑 때문에 예수처럼 양 팔을 뻗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팔은 살점이 떨어져나간 곳도 있었고 도려내진 곳도 있었다. 다리는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넝마가 된 옷은 검붉은 얼룩이 한 가득이었다. 죽었다고 봐도 좋을 몸을 감흥 없이 바라보며 크라울리는 번들번들하게 닦은 구두코로 사내의 다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그 작은 충격에도 남자는 끙, 하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딘에게 한방 먹었나보지? 여기 와서 화풀이를 하는 걸 보면”

 

 

갈래갈래 찢어놓은 것처럼 새는 목소리였다. 달싹이는 입술은 말라있었고 관리하지 못한 수염은 엉망이었다. 본디 허스키하던 목소리는 고문에 새된 신음을 한참이나 내질렀던 통에 더욱 엉망이 되어있었다. 불문명한 발음은 잘린 혀끝 때문이었다. 본래도 또박또박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크라울리는 고개 숙인 그가 저를 보지 못함을 알면서도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아니야. 나는 이제 네가 인정하길 바라고 있는 거야, 이빨 녀석아.”

 

“…….”

 

“딘 윈체스터는 너를 잊어버렸다고. 연옥에서 잠깐 만난 흡혈귀 따위, 그 녀석이 오래 기억할 것 같아?”

 

 

베니. 달래듯, 크라울리가 이름을 불렀다. 부드럽게 혀를 굴려 다시 한 번 크라울리가 이름을 불렀다. 베니.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줘.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란 건 이런 게 아닐까. 가르랑대는 숨을 내쉬며 베니는 생각했다. 방금까지 저를 난도질하고 찢어놓던 것이 무색하게 어르고 달래는 꼴이라니. 연옥에서 험한 꼴 보며 살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홀라당 넘어갈 만큼, 강약 조절이 자연스러웠다. 베니는 웃음을 터트리려 했지만 목에서 들끓는 피 때문에 그저 피가래를 바닥에 퉤, 하고 뱉을 따름이었다.

 

 

“……네 속셈이 훤히 보여서 동의해 줄 수가 없단 말이야.”

 

“속셈?”

 

“내가 동의하면, 너는 나를 데리고 딘을 괴롭히려 들겠지.”

 

“…….”

 

 

크라울리가 칼끝으로 제 코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 안 되나? 자문자답을 하듯 중얼거리고선 작은 콧방귀까지. 여태까지 두 형제 녀석이 자신을 괴롭힌 게 얼만데, 이정도 재미도 못 본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딘 윈체스터가 유일하게 곁을 내어준 괴물을 잡았다면 만족스러울 만큼 이용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딘의 정신을 무너트리고, 혼란을 야기하면서.

 

베니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어렴풋이 딘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이즈가 껴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얼굴. 지옥에 갇혀있는 동안 머릿속에 담아놓은 추억거리들은 온통 휘발해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기억은 흐려져서 그나마 가장 선명한 것은 ‘베니!’하고 저를 부르던 목소리뿐이었다. 그런 녀석한테 홀리다니 나도 제정신은 아니야. 속으로만, 그 말을 중얼거렸다. 크라울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속내였으므로.

 

 

“아쉽게도 말이야. 나는 아직도 딘의 친구거든.”

 

 

딘에게 해가 될 짓을 하자는 제의는 거절한다. 무거운 고개를 굳이 들어 눈을 맞추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베니가 사납게 웃었다. 시선을 맞춘 채로 크라울리는 칼을 고쳐 쥐었다. 오, 지옥의 창녀씨. 내가 허벅지가 가려운데 좀 긁어주지 않을래? 베니가 이죽이었고, 크라울리는 수직으로 세운 검을 그의 허벅지에 곧장 박았다. 갈가리 찢어지는 비명이 지하 감옥에 가득차고도 넘쳐, 온 지옥을 생생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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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백은수

이후로 재범파는 무척이나 지루할 정도로 이렇다 할 고난 없이 승승장구했다. 제일파를 누르고 강남권을 집어 삼켰고, 화룡파와의 싸움은 싱겁기까지 할 정도였다. 물론 그 밑바탕엔 동명수의 공작이 깔려있었지만, 리학수를 제외한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재범파의 입지는 올라갔고, 무리는 불어났으며, 싸움 없이 복속되는 자들이 늘었다.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명수는 이중구와 리학수를 앞세우고 모든 일을 불도저마냥 밀어붙였다.

 

서울을 장악하는 데는 예상보다도 적은 시간이 들었다. 이중구가 내심 동명수를 인정해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겸상도 꺼려하던 처음과는 달리 이중구는 어딜 가든 동명수를 대동하고 다녔다. 동명수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흘러들어오는 정보는 리학수보다 이중구를 거치는 것이 많았고, 정보가 흘러드는 속도 또한 빨랐다. 동명수는 이중구를 이용해 저의 공을 세웠고, 북에서의 명예와 입지를 드높였다. 여전히 북으로 올라가는 보고는 모두 동명수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리학수는 여전히 저의 핏줄을 찾는데 연연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학수가 제 할일을 마냥 방치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동명수는 리학수의 모든 업무에 제가 손을 대고 조종하길 바랐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수를 쓰는 중이었지만 제 자식 찾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차에도 리학수는 저의 자리를 지킬 줄 알았다. 리학수가 그저 동명수의 말에 고분고분히 따라준 것은, 혹시나 그의 아비에게로 나쁜 말이 올라가 제가 조기 귀국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리학수는 조직의 일에 발 벗고 나서지 않았지만, 뒷짐 지고 방관하지도 않았다. 리학수는 그저, 동명수가 자신이 조직의 모든 경영권을 쥐고 있다는 오만을 지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편이 리학수에게는 편했다. 피가 덜 마른 머리는 쉽게 결단했고, 신중함이 적었다. 둘의 관계는 물고 물리는 중이었지만 동명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동명수에게 리학수는 그저 저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오만이었고, 자만이었다.

 

아마 표종성이었더라면 제가 부러 이러고 있음을 진작 눈치를 챘을 것이라고 리학수는 어림짐작했다. 표종성은 그의 아래에서 많은 것을 배운 제자였다. 많은 것을 배웠고, 응용했으며 스스로 깨쳤다. 또래에 비해 아는 것이 많았지만 자만하지 않는 놈이기도 했다.

 

동명수와 표종성 모두 리학수의 문도였다. 비록 둘이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둘은 행색부터 말투까지 정 반대였는데, 표종성은 앳되었을 적부터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면 동명수는 어릴 적부터 여태까지 동네 양아치의 행색이 엄연했다. 행동만큼이나 둘의 성격은 대조적이어서, 리학수는 가끔 저 둘이 반목하게 될 것을 염려했다. 특히나 언제부턴가 의도적으로 표종성에게 껄떡거리는 동명수를 볼 적이면 더욱 그랬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사무실 문이 조용하게 열렸다. 칠이 덜 된 쇠문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거슬리게 들렸다. 리학수는 이제 저 소음을 들을 날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곱씹으며 중구를 가만 바라봤다. 왼편의 소파에는 이미 동명수가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다. 동명수는 들어온 이중구에게 눈짓으로 아는 체를 했다.

 

 

“앉아라.”

 

 

그 말에 이중구는 동명수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중구는 길다 못해 늘씬하게 뻗은 제 양 다리를 모으고 반듯이 앉는 것이 영 불편해보였다. 동명수는 이중구의 어깨너머로 칠이 벗겨진 사무실 벽을 보다 이중구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보였다. 처음에는 입을 길게 찢고 웃는 뱀 같은 느낌에 어딘가 음습하게 느껴졌던 그 웃음도 이제는 익숙해진지가 오래라 이중구는 동명수를 가만 보다 리학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름이 아니라……, 너도 이제 이사님 소리 듣고 살아야하지 않겠니?”

 

 

리학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중구는 어떤 대답이 적절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그저 침묵했다.

 

 

“이제 재범파란 이름도 그만 쓸 때가 되었지 싶구나.”

 

“……예?”

 

 

되묻는 이중구의 말에 석동출은 조곤조곤하게 대답했다. 회사를 만들자, 라고.

 

조금은 어벙벙한 기분에 중구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재범파의 몸집이 불어나자 리학수는 경찰과 연루될 만한 연장질을 금하는 한편으로 리조트 건립을 추진시키는 등 조직의 깡패 탈을 번듯한 것으로 갈아 끼우는데 갖은 노력을 들였으니 말이다.

 

다만…….

 

 

“왜 말이 없니?”

 

“아, 그, 아닙니다. 그냥……. 좀 갑작스러워서.”

 

 

그래, 갑작스러웠다. 중구는 저희들이 번듯한 사업체로 탈바꿈하는 것은 적어도 설악지구 리조트가 완공된 후로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일 년도 더 남지 않았던가. 리학수는 마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리학수가 아닌 석동출로서 이중구에게 해 줄 대답이 없던 탓이었다. 리학수는 잠시간 동명수를 응시했다. 동명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그들의 대화를 가만 듣고만 있었다.

 

애초에 일을 이토록 급격히 전개시킨 것은 동명수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형님. 빠를수록 좋지, 뭘.”

 

 

동명수가 가볍게 말했다. 새끼야, 나도 그건 알아. 하고 대답하려던 것을 이중구는 속으로 밀어 넣었다. 리학수가 있는 자리에서 이중구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다.

 

 

“지방에서 받아달라고 오는 세력들까지 뭉치면 어디 가서도 밀리진 않을 정도로 몸집을 불릴 수 있을 거다. 경찰들이 우리에게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한가지 밖에 없는 건 너도 알잖니. 웬만해선 건들 수도 없게 세력을 불리는 거뿐이지.”

 

“번듯한 기업으로 조직 세탁도 좀 하고.”

 

 

동명수가 리학수의 뒷말을 이었다. 가로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래. 명수 말이 맞다. 중구 네가 애들하고 같이 하나씩 정리해라. 명수가 도와줄 거다.”

 

“예.”

 

 

중구가 짧게 대답했지만 명수는 대답대신 고개만 대충 주억거릴 뿐이었다. 저놈의 버르장머리. 중구는 이번에도 제 생각을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명수를 흘겨봤는데, 동명수는 중구의 시선에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명수가 셋이서 저녁이나 같이하잔 말을 꺼냈지만 리학수는 다른 일이 있다며 제안을 물렸다. 보나마다 아들 일이겠지. 동명수는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했다.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중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리학수를 돌아봤다.

 

 

“여수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우릴 좀 보자는구나. 중구 네가 가보렴.”

 

“여수요?”

 

“그래. 병합을 제안하러 온 모양이야.”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재범파가 서울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날리자, 지방에서 저희를 받아 주십사 하고 올라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니.

 

 

“거기 우두머리라는 작자들이 다 중국산이랍디다. 메이드 인 차이나. 접대는 중국집에서 하는 게 어떻겠소?”

 

 

동명수가 사무실 바닥에 신발 밑창을 긁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중국산?”

 

“화교 말이요.”

 

“그래?”

 

 

중구가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잘 해줘라. 한국에서는 별 볼일 없어보여도 중국 쪽으론 발이 넓어서 벌써 삼합회와도 통하고 있는 모양이야. 잘 구슬려야 모두에게 좋을 거다.”

 

 

리학수의 말에 중구는 짤막하게 예, 하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죽 소파에서 끼긱대는 소리가 났다. 이중구를 따라 일어선 동명수가 중구보다 먼저 움직여 사무실 문을 열었다. 동명수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리학수를 잠시간 흘깃거렸는데 마치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어이, 형님.”

 

 

문을 닫자마자 동명수는 저를 뒤로하고 휘적휘적 가버리는 이중구 뒤를 잽싸게 쫓았다.

 

 

“뭐냐, 또.”

 

“내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말이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동명수는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엄청난 기밀 사항을 누설하고 있기라도 한 냥. 평소에 언행이 가볍기는 하나 별 볼일 없는 일에 호들갑 떨지는 않는 동명수의 성격을 알기에 이중구는 휘적휘적 가 버리는 것 대신 그 자리에 멈춰서는 것을 택했다.

 

 

“뭘 들어?”

 

 

이중구의 물음에 동명수는 중구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게……, 이번에서 올라온다는 여수 놈들 말이오. 큰형님 눈에 들었나보던데.”

 

“그래서.”

 

“조심하란 말이지. 혹시나 나중에 형님자리 꿰차겠다고 분수도 모르고 숟가락 내밀지도 모를 일 아니요? 큰형님은 삼합회랑 친분 맺어서 나쁠 건 없으니 한자리 턱, 내줄 수도 있고.”

 

“난 또 뭐라고…….”

 

 

이중구는 동명수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너는 깡패라는 놈이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 어디 일은 제대로 하겠냐, 하고 덧붙이면서. 중구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동명수는 자연스럽게 제 호주머니를 뒤져 이중구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이며 이중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인상을 얕게 찌푸렸다. 우아한 깡패. 동명수는 이중구를 그렇게 평가했다. 어찌 보면 칭찬이기도 했지만 돌려 말하자면 어떻게 해도 이중구는 깡패 탈을 벗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애초에 가장 귀족에 가까운 것은 동명수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 국가의 권력자 아들로 태어나 최상의 것들만 보고, 먹고, 입으며 자란 동명수에게 이중구의 겉치레적인 우아함은 성에 찰리가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만 간신히 덮어씌워놓은 우아함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중구에게 꽤나 그럴싸하게 어울렸다. 180은 훌쩍 넘는 키와 다부진 골격 탓일 수도 있었고,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고압감 탓일 수도 있었다. 이중구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구는 유독 껄렁한 차림새, 가벼운 말투, 진중함이 없는 태도 따위를 질색했다.

 

그 때문에 정청은 첫 만남부터 이중구에게 그다지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줄 수밖에 없었다.

 

리학수가 언급했던 여수의 조직은 정청과 이자성의 무리였는데, 북대문파라는 조직의 이름은 정청이 자주 가던 중국집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자성은 명실 공히 북대문파의 2인자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정청을 향한 이자성의 판단력은 옳았다. 여기저기서 흔히 보던 양아치와 정청은 달랐다. 평소에는 여타의 건달들보다 더욱 가볍고 껄렁댔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야차로 돌변했고 머리 또한 꽤나 좋은 편이었다. 때문에 이자성은 더욱 긴장해야만했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지내던 사이에도 필요하다 싶으면 뱃가죽에 칼을 쑤셔 넣는 인물에게 제가 경찰임을 들켜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자성은 주기적으로 강형철과 연락 중이었다. 강형철은 이자성 이후로도 여러 프락치를 양산하고 중간 대화 책을 마련했으며 나름의 네트워크를 생성했다. 북대문파가 몸집을 불릴수록 강형철 소속 프락치들 역시 머릿수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형철은 이자성 외에도 북대문파에 몇몇 경찰을 심어두었으나 그 사실을 이자성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것은 혹시나 있을 이자성의 배반을 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자성이 마지막으로 강형철과 면대 면을 한 것은 반년 전이었는데, 자성을 보자마자 형철은 ‘이제 제법 깡패 냄새가 나는구나.’하고 말했다. 이자성은 그 말에 항의하듯 인상을 구겼지만, 그 행실마저도 동네 양아치와 비슷했다. 엉성한 프락치보다야 진짜 깡패 같은 놈이 더욱 쓸 만한 것은 사실이나 강형철은 자성이 뼛속까지 깡패가 되어버릴 것은 염려했다.

 

강형철은 이자성의 예상보다도 더욱 가깝고 은밀한 곳 까지 저의 눈을 심어두었다. 그 때문에 이자성이 강형철에게 ‘정청이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오.’ 라고 했을 때도 강형철은 콧방귀인지 모를 잔기침을 뱉어냈을 뿐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

 

 

셋의 만남에서, 이중구는 불편한 심기를 억지로 삼켰다. 다름이 아닌 정청 때문이었다. 불량한 자세, 껄렁한 말투,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것 같은 옷까지. 차라리 정청 옆에 지키고 선 이자성이란 놈이 이중구의 성향과 맞았다. ‘반갑소, 나넌 정청이요.’하면서 악수를 하려 드미는 손에 병균이 득실대기라도 한 냥, 이중구는 잠시간 그 손을 내려다보곤 닿은 듯 만 듯 손을 살짝 맞잡으며 ‘이중구요.’하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 짝은 세상에 둘 도 없는 우리 부라더, 이자성이요.”

 

 

정청은 자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자성은 작게 목례했다. 동명수는 자리에 없었다. 평소엔 이리저리 잘도 나돌아 다니면서 이렇듯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고, 중요한 회담이 오갈 적이면 동명수는 자리에 나타나질 않았다. 이중구는 그저 동명수가 큰일에는 아직 부담을 느끼는 것이겠거니, 지레짐작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동명수는 저의 얼굴이 팔리기를 원치 않은 것이다.

 

리학수야 남한에 내려오며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지만 동명수는 고스트로서 리학수와 동행한 것이라 남한의 서류상으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의 눈에 띄면 좋을 것이 없단 소리였다. 비록 지금은 서울의 패권 장악과 재범파의 권력 차지가 시급해 나서서 행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지만 후에 재범파가 저의 계획대로 거대한 공룡이 된다면 동명수는 음지로 숨어들 요량이었다. 동명수는 이런 일에는 보통, 자리에 동참하는 대신 제 수하를 딸려 보내곤 했다. 이번에도 장지문 밖에 동명수의 수족이 지키고 서있는 중이었다. 호위라기보다는 엿듣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정청이 젓가락을 들어 식탁위에 탁탁 쳐 높이를 맞추고선 눈앞의 초밥을 집어 들어 입에 밀어 넣었다. 동작들은 요란스러웠다. 우아하지 못하긴. 이중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놈을 대장으로 둔 패거리 수준이야 안 봐도 뻔할 뻔자지. 이중구의 속내를 미묘한 표정 변화에서 읽어 내린 것인지 이자성은 식탁 밑으로 정청의 허벅지를 툭, 쳤다. 으적으적 초밥을 씹어대던 정청이 이자성을 한번 보고선 그 시선을 이중구에게로 돌렸다.

 

 

“나가 시장 혀서 먼저 묵어버렸네잉. 거, 그 짝도 드셔요잉?”

 

 

말이야 좋은 말이지 이자성은 정청의 말밑에 도사린 의미를 알았다. 재범파 대가리도 아닌 네 놈이 자신이 이러는데 어쩔 거냐는 소리였다. 다행스럽게도 정청의 표정은 한없이 들떠보여서, 이중구는 수면 밑에 깔린 의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중구와 이자성은 젓가락 한번 들지 않았다. 정청은 혼자 초밥을 서너 개 더 집어먹고는 물로 입가심을 했다.

 

 

“자아, 인자 일 얘기를 쪼까 해야쓰겄네잉.”

 

 

정청이 이에 낀 음식을 꺼내듯 쯧쯧 소리를 냈다. 이자성이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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