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C: The Bunker] Markus x Ahab

 

 

 

우리는 악연이자 질병이고, 폐허이자 공허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자에게 에이헵은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잘 될 리가 없다고. 너도 말했잖아. 우리는 같이 좆 된 것뿐이라고. 에이헵이 말을 삼켰다. 입으로 뱉으나, 뱉지 않으나 다를 바 없었다. 피가래가 끓는 목에선 가르랑 가르랑 쇳소리가 났다. 세상은 여전한 흑백이었다.

 

* * *

 

이백경은 선천적 색맹이었다. 명암으로 구분되는 흑백의 세상에서 그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았다. 정확한 통계치는 매년 바뀌기도 하거니와, 본래 이백경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에는 통 관심이 없어 인류의 반이 색맹인지, 그보다 적은 수가 색맹인지, 아니면 80퍼센트가 색맹인지 그는 무지했다. 얼마 전에 60퍼센트라는 얘기를 본 것도 같았는데. 작열하는 하얀 태양빛과 먹색의 그림자가 밀려나는 흙바닥을 응시하며 이백경은 까만 신발 코로 바닥을 툭툭 걷어찼다. 관심 밖의 것들에 그는 때로 무섬증이 일 정도로 무심했다.

더러는 이것을 낭만이라 불렀고, 더러는 운명이라 불렀으며, 더러는 순리라고 했다. 이백경은 이것을 일컬어 불편이라 불렀다. 이 세상은 비효율적인 불편을 안고 살아가도록 설계가 되었다고, 그는 종종 불만을 토로했다.

 

“저는 조금, 그런 게, 로맨틱한 것 같지 말입니다.”

 

유독 백경의 앞에서 말을 더듬거리던 놈이 어쩐 일로 자기주장을 세웠다. 담배 끝을 앞니로 걸쳐 물고 라이터를 찾던 백경은 눈썹을 꿈틀하며 ‘그래?’하고 반문했다. 백경과 정반대의 의견을 내고 눈을 마주칠 자신은 없었는지 동희의 시선은 애매하게 아래로 깔려있었다. 어렴풋한 시선의 끝에는 백경의 까만 신발 코가 걸려있었다. 햇볕에 반짝대는 모래알이 몇 개가 붙어있는 군화였다. 백경은 입 꼬리를 당겨 웃었다.

 

“로맨틱은 무슨 로맨틱……. 야, 21세기에 색맹 치료법이 사랑인 게 말이 되냐? 그리고, 뭐. 이름? 야, 너 그러다가 네 운명의 상대 이름이 이마빡에 대문짝만하게 발현되면 어쩔래?”

“아, 그, 그건…….”

“그래도 로맨틱이라고 할래? 너도 당장 피부 이식수술부터 찾아볼걸?”

“…….”

 

주머니를 뒤져도 라이터는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어디 흘렸나, 백경이 얕게 인상을 찌푸리면 옆에 멀거니 서서 어물대던 놈이 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백경이 익숙하게 고개를 모로 틀며 바람을 막으면, 녀석은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길게 한 모금을 빨 때, 종이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소리가 자글자글했다. 태양에 끓는 흙의 소리와 닮은 것도 같았다.

 

“너는 담배도 안 피우는 애가 라이터는 꼭 들고 다니더라.”

“그거야…….”

“그거야?”

“대위님이, 피우시니까…….”

 

말끝이 흐려졌다. 똑바로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문장에도 백경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기특한 짓 하는 놈을 그런 걸로 구박할 만큼 백경은 딱딱하지 않았다. 귀여운 놈. 생각은 손으로만 삼키고, 백경은 단단한 손으로 저보다 작은 놈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놈의 어깨가 바짝 굽었다. 겁을 먹은 것처럼 녀석은 수줍음을 떨곤 했다.

이백경의 담배 끝은 빨갛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옆에 선 놈의 눈에는 하얀 심지 속에서 붉게 타서 검게 죽는 불씨가 선명했다. 하늘은 회색이었다. 놈은 애꿎은 신발만 흙바닥에 지익지익 긁어냈다.

 

“…그래도 가끔 궁금은 하더라.”

 

길게 두 모금을 빨아 담배의 삼분의 일 가량을 태워 없앤 이백경이 불쑥 화제를 던지면, 아직도 어린 티가 덜 빠진 놈이 한 박자 늦게 ‘예?’하고 반응을 보였다.

 

“색깔이란 거. 궁금은 하다고.”

“아…….”

“동희 너도 색맹이랬나? 한 번도 색이 보인 적은 없고?”

 

백경이 물었고, 동희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어어. 입 안에서 작은 웅얼거림이 뱅뱅 돌다 삼켜졌다. 백경의 담배 끝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희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눈앞의 색을 애써 무시했다.

인생에 둘도 없을 인연의 이름이 피부에 새겨지는 세상. 사랑에 빠진 자들에게만 색깔이 허용되는 세계. 이백경은 선천적 색맹이었으며, 유동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색맹이 흔한 세상. 무채색 제품의 소비량이 가장 높은 세상. 더러는 이를 낭만이라 불렀고, 더러는 순리라고 불렀다. 동희가 제 옆의 사내를 응시했다. 담배 끝은 새빨갰다. 아직 하늘은 회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백경을 중심으로 동희의 세상은 색이 번지고 있었다. 로맨틱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동희는 생각했다.

 

“…예. 그렇지 말입니다. 색맹.”

 

로맨틱은 비참을 포함하기 마련이었다. 동희는 시야에 들어서는 색상이 절대로 허락되지 않을 종류임을 알았다. 이백경은 부드러웠지만, 그의 선은 명백했다. 이백경이 동희에게 그어준 선은 아끼는 부하라는 울타리였다. 벗어나면, 이백경은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었다.

아직은 하늘이 회색이기 때문에, 자신이 한 말이 마냥 거짓말은 아니라고 동희는 자위했다. 백경의 눈은 애매한 회색지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희의 손목에는 작은 점자가 흐리게 번지던 시기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두 달 전이기도 했다. 죽은 동희의 손목에는 ‘이’ 라는 단 한 글자만 간신히 적혀있었다.

 

* * *

 

태어난 사람의 몸에는 이름이 적힌다. 살면서 마주할 중요한 인연을 미리 알려주는 이정표에 가까웠다. 이름이 나타나는 시기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었으나, 부모의 발현 시기가 자식에게 유전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백경의 아비는 마흔 줄에 들어서야 이름이 나타났다고 했다. 그의 어미는 죽을 때까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혹은 그녀가 비밀리에 부친 것일 수도 있었다. 백경은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았다.

이백경의 아버지는 복사뼈 위에 이름이 드러났고, 그것은 백경도 그의 어미도, 심지어는 아비조차도 읽을 수 없는 아랍어였다. 살면서 마주할 가장 중요한 인연은 때로 단 한 번도 마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백경이 어릴 적 부모님의 싸움이 일면, 백경의 아비는 스무 살 적에 당신 이름이 드러났다던 사내랑 결혼하지 그랬냐며 백경의 어미에게 어깃장을 놓았다. 백경의 어미는 그럴 때면 아비의 발목을 가리켰다. 아주 비행기타고 운명의 상대나 만나러 가라며 그녀가 일갈했다.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백경은 모른 척 제 방에 틀어박히곤 했다. 운명의 상대니, 색깔이니 하는 것들은 삶의 불편에 불과했다. 몸에 드러나는 이름이 정확히 서로를 가리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운명의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같은 나라 사람이기는 한지, 같은 언어권이긴 한지, 나이대가 비슷하긴 한 건지. 모든 정보는 불분명했고, 변수는 많았다. 이후에 들어본 바에 의하면 백경의 아비 몸에 새겨진 것은 전형적인 사내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의 아비는 평생을 통틀어 사내와 정을 통한 적이 없었다. 운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름은, 일상에 녹아들면 그저 부부싸움의 소재밖에 되지 않았다. 백경이 아는 한에선 그랬다.

그래도 부모님이 두 분 다 색약이라고 하셨죠? 아비의 납골당 옆자리에 어미를 안치시킬 때 들었던 질문이었다. 백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운명의 이정표라면, 색상은 감정의 온도계에 가까웠다. 색맹으로 태어난 자들은 마음에 누군가를 온전히 담고 나서야 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한계는 존재했다. 마음에 담았던 상대의 생이 끝나면, 존재하던 색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흑백만 잔여 했다. 잔인한 세상이었다.

저에게 주어진 이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색은 채도가 낮은 상태로 머물렀다. 운명을 거스른 벌이라도 주듯, 색상은 온전하게 시야에 담기지 않았다. 이 어디에서 낭만을 찾을 수 있다는 건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백경의 부모는 평생에 걸쳐 선명한 색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잠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대부분이 그렇게 삶을 살았다. 주어진 이름과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단 한 순간도 선명한 색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백경은 이를 불편이라고 불렀다. 그는 색맹이었고, 색을 몰랐으며, 이름은 드러날 기미가 없었다.

백경은 불만하지 않았다. 에이헵이 되던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흑백의 세상을 살았다. 이름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 * *

 

“대장! 왜 저 새끼를 굳이 데리고 오는 겁니까? 예? 자기 팀도 파는 새끼가 나중에 우리라고 못 팔겠어요?”

 

최이현이 길길이 날뛰었다. 에이헵에게 그가 목청을 이토록 높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에이헵은 담배를 입에 물고, 기름 라이터로 끝에 불을 붙였다. 그는 더 이상 라이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길게 담배를 빨며 미간을 찌푸렸고, 최이현은 작게 욕을 씹어뱉었다. 최이현은 마쿠스에 대한 에이헵의 비이상적인 관심을 유독 불편해했다. 그는 종종 짐승마냥 감이 좋았다.

아마도 본능적인 적색경보가 들어온 모양이지. 마쿠스란 놈이 워낙에 위험해보이니까. 에이헵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대장은 자신이었고, 이현은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이헵은 동료를 배신한 마쿠스를 제 곁에 들였다. 에이헵의 결정을 모두가 탐탁치 않아했다.

 

“내가 언제 잘못된 결정으로 팀 말아먹은 적 있어?”

“하지만, 대장. 차라리 지금이라도 처리하는 게…….”

“최이현.”

“…….”

“결정했다. 저 놈은 우리랑 같이 간다. 좋은 동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사냥꾼은 되어 줄 거야.”

 

에이헵의 결정을 밀어붙였다. 최이현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는 답지 않은 에이헵의 특별대우가 억울한 모양이었다. 팀은 웅성거렸지만, 에이헵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차림으로, 여기저기 거즈를 붙인 마쿠스는 그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이현과 에이헵을 번갈아 응시하는 중이었다. 본부로 돌아가는 수송차량은 시끄럽고 날이 서 있었다.

제럴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먼저 에이헵을 말렸어야 정상인 놈이 그 날은 에이헵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뭐라도 한 마디 해 달라는 듯 드미트리가 신발코로 제럴드를 툭툭 쳤지만, 제럴드는 어깨를 으쓱하는 게 끝이었다. Maybe. It will be fine. 제럴드가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법한 대답은 아니었다. What? 드미트리가 되물으면 제럴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에이헵이 만족스럽다는 듯 작게 코웃음을 쳤다.

마쿠스의 시선은 여전히 에이헵에게 박혀있었다. 그는 대다수가 환영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뻔뻔스러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신히 지혈이 됐는지, 목덜미에 둘둘 말아대고 있던 거즈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물이 멈췄다. 폭탄이 조금만 더 가까이서 터졌더라면 숨통이 끊겼을 법한 상처였다. 마쿠스는 그르렁대는 숨을 몰아쉬었다. 죽기에는 너무나도 생동하는 짐승의 숨소리였다.

에이헵에 이어 제럴드까지 같은 의견을 보이자 이현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제럴드까지 용인한다면 더 이상 반기를 들 놈이 없었다. 블랙 리저드를 움직이는 가장 큰 두 축이 아니던가. 씨발. 욕을 삼킨 이현은 마쿠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마쿠스는 그저 히죽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이 팀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난리 통에 너덜해진 에이헵의 바지의 찢어진 틈 사이로 하얀 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마쿠스는 제가 겨눴던 다리에서 나던 타격 음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카강 소리는 날카로웠다. 사람의 다리에서는 날 수 없는 소리였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던 완벽한 팀의 불완전한 대장이라니. 걷잡을 수 없이 돋아나는 흥미에 마쿠스는 미소를 참기가 어려웠다. 덜컹대는 수송차량 안, 빛을 받아 반사되는 에이헵의 다리는 흰색이었으며, 마쿠스의 손을 적시는 피는 짙은 회색이었다.

Did you see it? 에이헵이 남들의 시선을 피해 제럴드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제럴드는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마쿠스의 목덜미를 응시했다. 지혈만 간신히 한 터라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상처가 크고 깊었으니 흉터도 그만큼 크게 자리할 게 분명했다. 새 살이 돋아 망가진 살점 위를 덮으면, 마쿠스의 목덜미에 대한 비밀은 제럴드와 에이헵만의 것이었다. 격전 중에 마쿠스의 스카프가 흘러내리고, 연이어 터져나가는 폭탄들 틈에서 제럴드는 그의 목덜미에 문신처럼 자리한 문자를 발견했다. 읽을 수 없었으나, 익숙한 모양의 문자였다.

진입하던 에이헵이 순간적으로 우뚝 멈춰선 것도 제럴드와 같은 것을 목격한 탓이었다. 마쿠스가 에이헵의 다리를 쏠 수 있었던 빈틈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움직임을 멈춘 적 팀의 대장. 마쿠스는 총을 갈겼고, 에이헵의 다리에 맞은 총알이 카강카강 소리를 냈다. 대응사격은 에이헵이 아닌 이현의 몫이었다. 주인을 지키는 충직한 델타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목덜미 털을 바짝 세운채로 마쿠스를 노렸다. 에이헵은 기둥 뒤로 몸을 숨겼고,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하얀 살결 위, 저보다 한 뼘은 훌쩍 큰 사내의 목덜미에 새겨진 것은 틀림없는 저의 이름이었다. 수 년 전에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던 이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에게 닥쳐왔다. 이백경. 선명하게 새겨진 세 글자가, 에이헵을 사로잡았다. 낙하산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죽어도 만나지 못했을 상대의 목에 새겨진 저의 이름이, 벅찼다.

에이헵은 숨을 몰아쉬었고, 수세에 몰려 죽음을 목전에 둔 마쿠스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조건은 간단했다. 다른 모든 팀원을 팔아넘길 것. 마쿠스는 숨을 헐떡였고, 망설이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을 뒤덮고 흘러내리는 피에 이름은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에이헵이 모는 배는, 그렇게 마쿠스의 고래를 사냥하고야 말았다. 그래, 마치 소설 백경처럼.

마쿠스 목덜미의 큰 상처는 얼룩덜룩하게 새살이 돋아나 흔적을 남겼다. 붉은 흉터였다. 마쿠스는 거울 속 자신의 목에서 붉은색을 읽어냈다. 단 한줌의 무채색도 섞이지 않은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 * *

 

에이헵의 예상대로 마쿠스는 에이헵의 곁에 꽤나 진득하게 머물렀다. 손쉽게 제 팀을 버렸던 놈 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마쿠스는 충성을 바쳤다. 종종 어깃장을 놓고, 성질을 부리고, 폭력적으로 굴긴 했어도 마쿠스는 블랙 리저드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에이헵의 주변을 맴돌다 마침내는 최이현의 자리까지 독식하고야 말았다. 아귀처럼, 마쿠스는 에이헵의 주변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저만을 남기려 들었다.

괜찮겠어? 기어이 버티지 못한 이현이 떠나던 날, 제럴드가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에이헵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떠나는 놈 보다야 마쿠스처럼 죽자고 붙어있는 놈이 차라리 낫지, 안 그래? 제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쿠스는 그저 붙어있는 것으로 만족할 사내가 아니었다. 기어이 모두 삼키려 들겠지. 불안감이 단전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제럴드는 말을 아꼈다. 속단하기엔 아직 일렀다.

그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하다면, 마쿠스는 자신을 버리지 못할 거라고, 에이헵은 생각했다. 마쿠스에게 작용하는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인력은 자신이 될 테니까. 에이헵은 틀리지 않았다. 마쿠스는 에이헵을 집어삼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제럴드는 마쿠스의 선을 넘는 집착을 걱정했으나, 에이헵은 개의치 않았다. 관계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한, 마쿠스는 옴짝달싹하지 못할 터였다. 마쿠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에이헵의 침대에 기어들어가는 일 정도였다. 강제성이 다분한 행위였지만, 에이헵은 어느 정도 그의 만행을 묵인했다. 마쿠스는 자신에게 각인되었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운명에게 인력을 느끼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고, 거부하고 싶지도 않은 인력이었다.

마쿠스는 에이헵을 찾아들었고, 찢어내듯 옷을 벗겼으며, 성급하게 의족을 뜯어냈다. 에이헵은 으르렁 거렸고, 마쿠스는 입맛을 다셨다. 병든 관계였다. 에이헵은 꿈에서 추락했고, 마쿠스는 꿈에게조차 에이헵을 양보하지 않았다. 마쿠스는 에이헵이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그를 탐했다. 마쿠스는 에이헵의 목덜미에 울긋불긋하게 남는 저의 흔적을 선명하게 읽어냈다. 보라색으로 든 멍, 붉은색으로 남는 자국. 충혈 된 눈과 노란 뱀이 수놓아진 그의 겉옷까지. 마쿠스는 에이헵에게서 색을 읽었다. 에이헵을 중심으로 색상은 퍼져나갔다. 담배 끝이 붉게 타올랐고, 하늘의 푸른색에 장악 당했다. 마쿠스는 에이헵의 목 조르길 좋아했다. 조르는 순간 숨이 막혀 시뻘겋게 열이 오르는 얼굴색이 좋았고, 이어 남는 푸르스름한 자국이 마음에 들었다. 마쿠스는 눈앞을 장악하는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

에이헵이 색을 보게 될 수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변화는 문득 찾아왔다. 마쿠스가 팀에 합류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시기였고, 지수가 임신을 한 지 삼 주쯤 되던 시기였다. 완벽한 흑백의 세상에 점점이 색깔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완벽하던 무채색에 그렇게 오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You……. Your eyes are, …blue."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건만, 에이헵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익숙하게 저를 밀어붙이는 놈의 번득이는 눈은, 파란색임을. 안광을 형형하게 흩뿌리는 투명한 눈은 분명한 푸른색이었다. 그건 ‘파란색’이라고 부르는 빛의 영역이었다. 에이헵은 숨을 삼켰고, 마쿠스는 우뚝 멈춰 섰다. 터져나갈 것 같은 긴장만이 맴돌았다.

마쿠스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분을 삭이지 못한 탓이었다. 너도 결국은 아빠라는 거지? 응? 그렇지? 대답해! 에이헵! 그놈의 아이가 뭐라고! 애가 뭐라고! 마쿠스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에이헵의 결혼에도, 자녀 소식에도 결연했던 것은 오로지 에이헵의 세계가 흑백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에이헵의 눈에 색이 스미기 시작했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졌다.

자식이 생긴 부모가 불현듯 서로에 대한 유대가 깊어지는 일은 빈번했다. 흐리던 색이 더욱 선명해지고, 생기를 머금었다. 그리고 종종, 에이헵과 같은 색맹이 색약의 영역으로 들어서기도 했다. 마쿠스는 눈앞에서 저의 것을 빼앗겼음을 인지했다. 끊임없이 물어뜯고, 핥고, 빨아내면서 그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자신보다, 문득 발생한 아이라는 존재가 에이헵에게 더욱 중하다는 사실을 마쿠스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분노했다. 푸른 눈의 안광이 번득였고, 흰 자에는 붉은 실핏줄이 돋았다. 색깔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에이헵은 그의 머리칼이 어지러운 금발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쿠스의 목덜미는 붉은 흉터가 크게 번져있었다.

에이헵은 당혹을 금치 못하고 마쿠스의 분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이헵은 지수를 떠올렸다. 아직은 부르지도 않았던 배를 떠올렸다. 낮에 통화하던 목소리를 되짚고, 그저께 들었던 임신 소식을 되짚었다. 마쿠스가 으르렁거렸다. 에이헵은 토할 것처럼 울렁이는 속에 애써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어지럽게 번졌다가 도로 사라지길 반복하는 색깔들에 멀미가 일 것 같았다. 아직 이름조차 없는 아이가, 자신을 색맹에서 끌어냈다는 생각을 하면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분노에 겨운 마쿠스가 스탠드를 집어던져 깨트리는 소리에 달려온 제럴드가 상황을 진정시켰다. 에이헵은 멍하니 의자에 걸터앉아있었다. 제럴드의 옷은 카키색이었다. 언제나 옅은 회색인 줄만 알았던 옷이.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돋아나는 색에 에이헵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색상의 향연이 감당하기 벅찬 탓이었다. 마쿠스는 드미트리까지 합세하고서야 간신히 진정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이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얇은 눈꺼풀로 가리기에는 맹렬한 시선이라, 에이헵은 마른침을 삼켰다. 눈을 감은채로, 에이헵은 애써 지수를 떠올렸다.

 

"You'll pay for this."

 

마쿠스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격정적으로 울컥울컥 뱉어지는 참이었다. 에이헵은 눈을 뜨지 않았다. 결국엔 괜찮아질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애써 위안했다. 정작 그 역시 시간에 치유 받은 적이 없음에도.

마쿠스의 탐욕을 간과한 것은 큰 실수였다.

 

* * *

 

She's giving a birth. 그 말에 입 꼬리를 비틀어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윤지의에게 기대 절룩거리는 에이헵의 얼굴을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란한 폭탄소리와, 번쩍이는 폭발들 사이에서도 마쿠스의 목소리는 선명한 환청으로 다가왔다. 에이헵은 기대어 걸었고, 윤지의는 에이헵을 부축했다.

On a day like today? 자신이 맥켄지에게 던지던 질문에 마쿠스가 얼마나 희열을 느꼈을지 에이헵은 곱씹었다. 멕켄지에게도, 에이헵에게도, 마쿠스에게도 오늘은 중요했다. 멕켄지에게는 맥그리거의 재선이 걸려있었고, 에이헵에게는 아이가 달려있었으며, 마쿠스에게는……. 그에게는 에이헵이 걸려있었다. 마쿠스는 에이헵에게 저울질을 강요했다. 말이 저울질이었지 마쿠스가 내어준 대답은 하나였다. Every man for himself. 에이헵이 뱉었던 말을 되돌려주면서 마쿠스는 모두를 버리고 저에게 오길 요구했다. 오늘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는 자식도, 아내도 버리고, 육 년을 함께한 동료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자신만 곁에 두라는 요구였다. 마쿠스의 탐욕은 에이헵을 집어삼키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종류였다. 에이헵은 그의 탐욕을 간과했고, 비극은 거기서 발발되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에이헵은 숨을 삼켰다. 웃음이 올라왔고, 동시에 비참이 들끓었다. 에이헵을 부축하는 윤지의의 팔은 단단했다. 둘은 같이 비틀댔으나 넘어지지 않았다. 늪처럼 에이헵을 옭아매던 탐욕은 이제야 막을 내린 참이었다. 반듯하게 펼쳐지는 수평선 너머로 버섯모양 구름이 솟아났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하늘을 찢고, 불타는 비행기가 추락했다. 갈대는 사락사락 바지를 스쳤다.

하얀 불꽃이 터지고, 회색의 바다에 격정적인 파장이 퍼져나갔다. 다리에 새로 감은 붕대에, 회색 피가 번졌다.

상대의 생이 끝나면, 존재하던 색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흑백만 잔여 했다. 잔인한 세상이었다. 웃음 끝에, 에이헵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빛의 농간을 드러내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잿빛 하늘을 보며 에이헵은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안광이 흉흉하게 빛나는 눈이었다. 햇빛 아래 부서지던 금발을 떠올렸고, 존재하던 이름이 붉은 흉터로 뒤덮였던 목덜미를 떠올렸다. 회색지대를 걸으며, 에이헵은 기억을 흘려보내려 애썼다. 그는 마쿠스가 죽었음을 확신했다. 그가 지금, 회색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에이헵은 수 년 전, 팔에 문신을 새기던 순간을 기억했다. 심장박동과 비슷한 모양으로, 팔을 길게 가로지르도록. 정말로 후회안 하시겠어요? 타투이스트가 물었고, 에이헵은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읽지도 못하는 단어였다. 에이헵은 운명으로 치부되는 것들을 그저 불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고, 글씨는 까만 심장 박동에 뒤덮였다. Маркус Дроздове. 에이헵은 읽지 못할 글씨였다. 그의 아비의 발목에 아랍어가 새겨져있었듯이, 유전처럼 에이헵은 전혀 모르는 언어의 이름을 얻었다. 그는 문신으로 위를 뒤덮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수 년 전의 일이었다.

완벽하게 푸른색으로 반짝이던 눈과, 붉은 흉터를 에이헵은 기억했다. 단 한 줌의 회색도 섞이지 않은 찬란이었다. 단언컨대 에이헵의 모든 순간 중 가장 선명하던 기억이었다.

에이헵은 바람이 살을 에던 겨울날, 후천적 색맹이 되었다. 세상은 여전한 흑백이었다.

Posted by 백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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